등록 : 2012.02.29 18:05
수정 : 2012.02.2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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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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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디자인 큐레이팅
변하지 않는 옷차림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구축한 상징화 전략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때 가장 강력한 기준점이 되는 것은 바로 ‘나다운 것’이라는 명제다. 옷이나 차, 하다못해 음식이나 손톱 색깔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어야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하루의 일들을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 다음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방을 들지, 그리고 그에 맞는 신발이 무엇일지 나만의 쇼타임이 펼쳐진다. 옷장 가득 옷을 걸어놓고도 막상 입을 게 하나도 없다는 여자들의 한탄은 단순한 허영만은 아닐 터. 내가 상징하고 싶은 모습을 정하고, 이에 맞게 연출하는 것은 그만큼 복잡할 뿐만 아니라 꽤 많은 유·무형의 비용이 발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다. 미야케 잇세이가 디자인한 블랙 터틀넥, 리바이스 청바지, 뉴밸런스 992 운동화는 그를 상징하는 드레스 코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조끼, 재킷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었다지만 이때의 스티브 잡스는 파란색 타이츠와 빨간색 망토를 벗어던지고 정장을 한 슈퍼맨만큼이나 어색하다. 블랙 터틀넥으로 대변되는 그의 스타일은 이후 사람들의 기억을 하나로 붙잡았다. 이 상징화 전략은 제품으로 시선을 쏠리게 하는 기능적 측면과 함께 프레젠테이션 전날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정서적 측면까지 말끔히 해결했다. 스티브 잡스는 옷장 가득 수백벌이나 되는 같은 디자인의 터틀넥을 가지고 있었다지, 아마.
2009년 무렵, <친절한 북유럽>을 집필할 때의 일이다. 현대 핀란드 디자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일카 수파넨(사진)을 인터뷰하기 위해 헬싱키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브라운 박사를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보다 더 눈에 띄었던 것은 뭔가 엉성한 행커치프. 블랙 재킷에 화이트로 포인트를 준 행커치프는 다름 아닌 ‘냅킨’으로 격식을 갖춘 차림을 재치있게 해주는 아이디어였다. 나중에 추가 자료를 찾던 중 알게 된 사실. 2007년에도, 2008년에도 그는 공식석상에서 블랙 재킷에 화이트 행커치프(엄밀히 말하자면 냅킨) 차림을 고수했다. 아마 사진 설명이 없다면 도대체 이게 5년 전인지, 올해인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았을 정도.
디자이너에게 의상은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 즉 철학을 담고 있는 또다른 언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디자인은 구축하고 허무는 기술이다”라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마 지금도 그는 곱슬거리는 금발머리에 냅킨을 꽂은 블랙 정장 차림으로 그의 이미지를 ‘구축’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을 것이다.
같은 스타일이 오히려 개성을 더 잘 드러내는 상징화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스티브 잡스와 일카 수파넨. 그들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스타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긴 생머리가 어울린다는 주변의 말에 줄기차게 유지해온 머리 스타일? 세련되면서도 분명한 느낌이 드는 기분 때문에 즐겨 입는 블랙(사실은 날씬해 보인다는 기능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재킷들? 단순히 보이는 장치로서가 아니라, 내가 이야기하려는 바를 외적으로 구축하는 또다른 언어로서, 상징적 스타일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참이다. 아, 물론 그 안의 속성을 갈고닦는 것은 기본으로 하고 말이다.
김선미 디자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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