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16 17:28
수정 : 2012.05.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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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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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디자인 큐레이팅
국내외 쟁쟁한 크리에이터 참여한 ‘페이퍼로드’전
2년 전인가, 우연히 외국에서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 하라 겐야의 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다. <디자인의 디자인>, <백 白> 등의 저서에서 작가 못지않은 글솜씨로 내 마음을 빼앗았던 그였기에 업무까지 미뤄가며 전시장을 찾아갔다. 무인양품 캠페인 ‘지평선’을 비롯한 각종 포스터, 북 디자인 등 종이 위에 담아놓은 그의 상상력은 흥미진진했다. 그런 그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페이퍼 로드, 지적 상상의 길’이라는 전시의 일환으로 개최되는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여한다는 것. 이 전시에는 하라 겐야뿐만 아니라 한·중·일·대만 작가들의 포스터 디자인, 북 디자인 등이 대거 상륙한다는, 참으로 설레는 소식이었다.
지난 7일 450석 규모의 서울 삼성동 코엑스 콘퍼런스홀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 교수의 발제 이후 정병규, 뤼징런, 마쓰오카 세이고, 하라 겐야 등 쟁쟁한 크리에이터들이 토론자로 나서 ‘종이’를 매개로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전개해갔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는 ‘페이퍼 로드, 지적 상상의 길’ 전시(사진)로 이어졌다.
제1전시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타이포그래픽 포스터 특별전은 일본의 종이회사 다케오가 수집하고 다마미술대학이 소장, 연구하고 있는 포스터 100점을 통해 1900년대 포스터들을 원본 그대로 만나볼 수 있다. 지금이야 대부분 컴퓨터 작업을 거쳐 대량 인쇄를 하지만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실크 스크린, 리소그래피(석판인쇄), 볼록판 인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포스터를 제작했다. 서체는 직접 그려서 회화적인 타이포그래피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정형화되지 않은 당시의 포스터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그 시대의 정서를 이양받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또한 정부 홍보와 기업 광고 포스터, 발레 무대미술의 전람회 공지, 오스트리아 분리파 전람회 공지, 영화 출연자 모집 광고까지, 포스터를 단서 삼아 그때의 상황을 그려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제2전시관에서는 안상수, 뤼징런, 칸타이킁, 스기우라 고헤이, 하라 겐야 등 한·중·일·대만 대표 그래픽 디자이너 및 북 디자이너 150여명이 무려 800여개의 작품으로 또다른 상상을 펼친다. 너무 많은 작품이 모여 있어서인지 조금 어수선한 느낌이 있지만, 종이 위 지적인 상상들은 여전히 흥미롭다. 전시 총괄을 맡은 김경균(한국예술종합학교 디자인과 교수) 총감독은 이번 전시가 디자인 유관자들을 위한 전시가 아님을 강조한다. 포스터, 광고, 책, 이 모든 것들은 종이라는 속성을 지닌, 우리의 일상에 너무 친숙하게 놓여 있는 것들이라는 것. 이 때문에 딱딱한 접근이 아닌, 편안하고 일상적인 시선으로 전시를 관람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이 지적 상상의 길을 걷고 나면 디지털 시대에 종이는 곧 사라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언에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것이다. 종이의 저 하얀 여백은 수천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수많은 상상의 모티브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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