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10 18:33
수정 : 2013.04.1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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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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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디자인 큐레이팅
나는 서울 풍경을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리는 데 익숙했다. 20대 초 나를 키웠던 홍대·신촌의 옛 아지트들은 거대해진 상업지구의 속성을 견디지 못한 채 문을 닫았고, 비루하지만 온기가 있었던 종로의 피맛골은 무뚝뚝한 신축물의 그림자에 함락되었다. 아무런 협의 없이 나의 추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었지만 이의를 제기할 상대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렇게 홍대가, 종로 피맛골이, 신사동 가로수길이 거대하게 변해갔다. 대기업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성형미인 같은 체인점만 즐비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색을 지니고 있는 숍을 발견할 때마다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걱정이 앞선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이너 허유가 운영하는 편집숍 ‘램’(사진)과 ‘램 아틀리에’는 다양성이 어떻게 오랫동안 존중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넘실거리는 삼청동을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은 고즈넉한 계동이 펼쳐진다. 이곳에 위치한 낡은 벽돌 외벽의 공간에 디자이너 허유의 편집숍 램과 램 아틀리에가 있다. 램(LAMB). 불균형적이면서도 단정한 그 발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디자이너 허유가 램이라는 이름의 편집숍을 꾸린 것은 약 11년 전. 원래도 기존 패션업계의 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옷을 만들던 허유는 자신의 속도와 닮아 있던 조용한 동네인 삼청동에 매료되어 첫 편집숍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브랜드를 모아서 보여주고 판매하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혹자는 램을 국내 편집숍 1세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후 북적이는 삼청동을 떠나 한적한 계동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지나치게 트렌디하지 않은 것’을 지향하는 허유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램에는 디자이너 허유가 만든 램바이허유(Lamb by Hur Yu)를 비롯해 옷, 액세서리, 가방, 신발 등 15개 남짓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가 모여 있다. 그렇게 램은 지난 11년간 묵묵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신진 디자이너들의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플랫폼 구실을 해왔다. 그리고 편집숍 램 옆의 두 집 건너에 디자이너 허유의 어머니가 계신 ‘램 아틀리에’가 있다. 2년 전쯤 소량이나마 직물을 직접 짜서 자신만의 작업을 해보고 싶었던 디자이너 허유는 취미로 태피스트리를 짜는 어머니 정영순씨에게 램 아틀리에를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램 아틀리에는 램의 직물연구소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 어머니가 다루는 베틀로 탄생한 직물 샘플은 영감의 대상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훌륭한 상품이 되어 날개를 달았다.
활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닌 시각디자이너에게 더 신뢰가 가듯, 직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패션디자이너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나뿐인 직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하루 종일 베틀을 돌리는 램 아틀리에의 풍경, 그리고 한국 패션디자인의 다양성을 고스란히 품은 채 반짝이는 눈빛의 사람들과 조우하는 편집숍 램의 풍경. 이것은 나에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서울 풍경이다. 램과 램 아틀리에가 오랫동안 이곳에 온전히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김선미 디자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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