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15 18:21
수정 : 2012.02.1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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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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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박종만의 커피로드|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 관장
‘산토스 커피’의 고향 브라질 산투스항 커피하우스에서 만난 할아버지
세계 제1의 커피생산국 브라질의 커피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2010년 1월 브라질 상파울루주에 있는 무역항 산투스를 찾았다. 커피회사 이름쯤으로 알고 있는 ‘산토스 커피’는 하역 시설이 잘 갖추어진 이곳 산투스항을 통해 수출되는 브라질 커피를 모두 일컬어 하는 말이다. 모카 항구를 통해 실려 나가는 예멘 커피와 에티오피아 하라르 커피 등을 ‘모카커피’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산투스의 유서 깊은 구시가지를 찾았다. 이미 신항으로 거점을 옮긴 항구는 쓸쓸함이 가득했다.
역사를 자랑하듯 산투스역에는 1867년 2월에 문을 열었다는 내용과 140년을 기념하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상파울루주 각지에서 생산된 커피를 세계 각국으로 보내기 위해 놓인 철로는 당시 브라질의 국가 경제를 부흥시킨 주역이었다. 커피농장 협회와 세계적인 커피 무역회사들이 포르투갈 식민지풍 건물에 줄지어 들어서 있다.
리네우 카를루스 브라질 커피박물관장을 만나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커피농장(파젠다·Fazenda)을 대대로 물려받아 운영한 집안 내력부터, 북쪽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건너와 벨렝을 거쳐 미나스제라이스까지 남으로 내려온 커피나무 이야기며, 흑인 노예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와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아마존 밀림의 환경 파괴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내 번화가로 발길을 옮겨 산투스식 커피하우스를 찾았다. 커피 바 위에는 번쩍이는 이탈리아제 에스프레소 기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길게 늘어선 카운터 테이블에는 10여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다른 한쪽에는 껌과 사탕 따위를 파는 유리 칸막이가 설치돼 있어 생소했는데 이를테면 커피하우스와 편의점이 결합된 멀티숍쯤 된다. 브라질식 에스프레소인 카페지뉴(Cafezinho) 한 잔을 시켜놓고 미소 가득한 바리스타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나는 세차게 문을 열고 들어선 한 할아버지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백발의 할아버지는 숨을 헐떡거리며 커피 바로 달려갔다.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에 보라색 속옷차림을 한 할아버지는 왼쪽 어깨 아래부터 손가락까지 깁스를 했다. 할아버지는 바에 앉기도 전에 걸어가며 커피부터 주문했다. 커피를 뽑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고작 30초 정도인데 할아버지는 ‘언제쯤 커피가 나올까?’ 하듯 바리스타의 손놀림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꼽아 기다린다는 표현이 딱 걸맞았다.
걸쭉한 커피에 브라질식 액체 설탕을 듬뿍 두른다. 그 커피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장탄식한다. 고개를 숙여 아주 천천히 조금씩 커피를 마시고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무언가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음이 분명했다. 작은 커피 잔에 담겨 나온 커피 한 잔을 할아버지는 여러 차례 나누어 마셨다. 마치 이 세상에서 마시는 마지막 한 잔의 커피처럼 그는 천천히 음미했다. 평소 같으면 여러 질문을 해봤을 테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간절함에 압도되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깊은 사연을 알 도리가 없었지만 커피 한 잔이 그리도 절실하게 느껴졌던 사람을 나는 다시 만나 보지 못했다.
지난 주말 모처럼 명동을 찾았다. 사람들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에 테이크아웃용 커피 컵을 들고 거리를 활보한다. 무심히 마시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산투스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마신 간절한 커피 한 잔을 떠올린다.
박종만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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