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14 18:01
수정 : 2012.03.1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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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종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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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박종만의 커피로드
피천득 선생에게 대접하고 싶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귀한 커피잔
여러 해 전, 봄이면 가장 먼저 핀다는 산수유가 따뜻한 햇살 아래 노란 꽃을 활짝 피운 어느 오후였다. 외출하려고 나서려는데 저만치 강기슭 미루나무 아래에서 한 노인과 그를 부축하고 걸어오는 중년 여성을 보았다. 공손함과 배려가 느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여 그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피천득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외출에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날 선생님께서는 내게 인연의 시작을 알리는 귀한 선물을 박물관에 남기고 가셨다. 우리나라 수필의 백미 ‘인연’이 담긴 수필집 한 권이었다. 표지를 펼치니 꾸불꾸불한, 아주 천천히 쓴 것이 틀림없는, 아흔이 가깝다고 믿기지 않는 고운 글씨체의 친필 서명이 담겨 있었다.
그해 가을, 선생님께서는 다시 커피를 드시러 오셨다.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과 소년의 수줍음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위엄, 권위, 비장함 같은 단어는 선생님의 사전에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고운 손으로 커피잔을 움직이신다. 햇볕을 받아 더욱 선명한 커피 한 모금에 환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모습에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꼭꼭 숨겨둔 충동이 밀려왔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봄과 가을 청명한 날이면 그 단아한 모습을 바로 곁에서 뵐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충동은 점점 커져만 갔다.
사실 나에게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커피잔이 하나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왕실이 썼던 커피잔인데, 손님 대접은 물론 나 자신도 아직 그 잔에 커피를 마셔본 일 없이 진열장에다 고이 모셔만 두고 있다. 20여년 전 여행 중 파리에서 시몬 보부아르가 글을 썼던 카페 되 마고의 구석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감격에 도취되어 여러 날 골동품상을 뒤진 끝에 어렵사리 구한 내겐 보물 같은 커피잔이다. 언젠가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커피 한잔 대접하고 싶은 분을 만나게 되면 드리려 귀히 아껴 둔 커피잔이다.
한번은 이 잔의 소문을 듣고 한 재력가가 찾아와 “그 잔에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생떼를 쓴 적이 있었다. 명망 높은 한 정치가가 찾아와 “그 잔에다 마실 사람의 자격이 무엇이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땅한 답변을 찾지 못해 곤란에 처하곤 했다.
여러 해가 지난 가을, 봄에 다시 만나자던 선생님과 헤어지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곧 봄이 오면 선생님께 그 잔에 커피를 담아 대접해야지!’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 봄에 온 마음을 다해 커피 한 잔을 만들고 선생님이 사랑한 여성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와 모차르트 피아노곡을 들으며 봄 향기에 흠뻑 취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봄에 다시 만나자시던 선생님을 그해 가을 이후에 더는 만날 수가 없었다. 유난히도 따뜻한 2007년 봄날 선생님은 소천하셨다. 스스로의 아둔함을 탓해야만 했다. 시간은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인연의 소중함을 깨달았더라면 낡은 커피잔은 주인을 찾았을 것을….
북한강을 마주한 뜨락에도 봄기운이 가득하다. 박물관 앞마당을 거닐며 “천국이 여기보다 아름다울까?”라시며 미소 짓던 선생님이 사무치게 그립다.
박종만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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