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25 17:28
수정 : 2012.04.2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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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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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박종만의 커피로드
허름한 예멘 커피집에서 떠올린 한국 ‘다방’의 추억
예멘의 수도 사나 구시가지에 있는 작은 커피 집을 찾았다. 천장을 가린 푸른 천막(오른쪽 사진)을 보며 나는 사막 한가운데서 푸른 바다를 떠올렸다. 바리스타 한 명, 서버 한 명의 단출한 가게다.
덕지덕지, 기둥 뒷면에 붙어 있는 메뉴판인 줄 알았던 천조각들은 자세히 살펴보니 이슬람 기도문이다. 2006년 12월에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집행된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의 사진과 바그다드 시내 사진들이 조각조각 붙어 있다. 작년 우리가 처음 예멘을 찾았을 때 느꼈던 두려움에 순간 소름이 돋는다.
테러세력이 판치는 위험한 나라로 알려진 예멘, 여기저기서 들려왔던 자살폭탄 테러 소식이나 젊은 미국인이 참수되는 동영상을 접했던 탓에 도저히 밖으로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옷이며 가방에 붙어 있던 나이키 상표를 모두 떼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기억이 난다.
커피 주전자와 물 주전자가 따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주문이 들어오자 미리 끓고 있는 큰 주전자의 커피를 계량해 작은 아랍 주전자로 옮겨 붓는다. 굵은 철근을 잘라 가스 불판을 만들어 그들만의 커피 머신으로 쓰고 있다. 청년 바리스타는 한마디 말이 없다.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는 진지함의 정수다. 누구에게서 배워서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몸에 밴 것일까? 주문이 여러 개 한꺼번에 들어오자 재빨리 유리컵에다 분필로 주문 내용을 미리 써둔다. 1분이 채 안 되어 꿀맛 예멘 커피가 나왔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차, 커피, 시나몬, 카더몬 외에도 분명 그 어떤 비밀스런 향신료가 들어갔을 것이다.
전쟁 후 새롭게 생겨난 우리나라 다방에는 지금의 바리스타 격인 ‘주방장’이 있었다. 그 시절 커피의 품질이라 해야 다들 그만그만한 수준인데다, 인근 다방들과 경쟁이 치열해지던 때인지라 ‘원두는 같은데 특별히 맛있는 커피를 만든다’고 소문난 유명 ‘주방장’을 서로 모셔 가려고 스카우트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다방의 주방은 주방장의 허락 없이는 감히 누구도 들어갈 엄두를 못 내던 그런 엄격한 공간이었다. 커피는 대개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아침 일찍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준비했다. 어떤 이는 커피 원두에 담배꽁초 한 개비를 풀어 섞기도, 어떤 이는 달걀 껍데기나 귤껍질을 섞기도, 또다른 어떤 이는 소금 한 움큼을 넣어 끓이기도 해 이른바 자신만의 비법으로 커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아주 센 불로 넘치는 커피를 내렸다 다시 올렸다 하는 일을 수차례 반복한다. 청년의 어깨너머로 모카 항에서 봤던 연유 캔들이 보인다. 한국에 돌아와 아무리 그 맛을 내려 해도 안 되던 것이 바로 이 단맛을 내는 공공연한 비밀 레시피인 연유 때문일 것이리라. 커피는 적당히 묵직했다. 잘 차려입은 예멘 신사(왼쪽)가 나무 테이블에 걸터앉아 주문한다. 그윽하게 눈을 감으며 커피 한 잔을 들이켠다. 그의 자세에서 멋스러움이 절로 풍긴다. 친구들이 오고 있다며 차 한 잔과 커피 여러 잔을 더 시킨다. 도대체 이 멋스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기다리던 친구가 반갑게 인사하며 그의 곁에 앉는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나지 않는 기억이다. 그가 커피 마시는 모습에 반해 한동안 나는 푸른 천막카페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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