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23 18:09
수정 : 2012.05.2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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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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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esc] 박종만의 커피로드
세비야 황금의 탑에서 ‘탈옥’해 마신 흙내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
과달키비르 강의 잔물결이 눈부시다. 산텔모 다리와 잘 어울려 세비야를 더욱 매력적인 곳으로 만든다. 쾌적한 환경과 좋은 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낭만적이거나 낙천적이기 때문일까, 오페라의 희극적 인상이 깊어서일까, 세비야에는 무언지 모를 흥겨움이 묻어 있다.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 강 옆에 버티고 있다. 13세기부터 군사전망대로 쓰이던 것이 대항해 시대에는 감옥으로 쓰였고 오늘날에는 해군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미 늦은 오후가 되어 혹시 입장 시간이 끝나 못 들어가면 어쩌나 하고 재빨리 들어갔다. 3층 망루에 올라 세비야 시내를 내려봤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분명할 텐데 나는 마치 남들은 얻지 못할 특권을 운 좋게 거머쥔 양 몹시 흥분했다. 망루에서 본 강은 콜럼버스의 대항해 시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너무 긴 시간을 몽환에 잠겨 있었던 것일까?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불이 모두 꺼져 있다. ‘올라?’(안녕?) 하며 소리를 내어 봤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슬그머니 망루에 올라간 나를 보지 못한 직원 둘이 나를 남겨둔 채 문을 잠그고 퇴근을 해버린 것이다. 사방은 어두컴컴해 두려움이 몰려든다. 굳게 닫힌 성문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쳤다. 중세에 감옥으로 썼던 건물인 만큼 두꺼운 나무문이라 두드려도 별 소리가 나질 않았다. 문틈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이 보일 때면 ‘헬프 미!’를 큰 소리로 외쳤지만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숨을 깊이 들이켜며 생각을 가다듬는다. 커피를 가득 실은 배는 세비야의 젖줄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와 이곳 황금의 탑에 닿는다. 시대가 다를 뿐 똑같은 공간에 선원들과 죄수들 그리고 나는 함께 이곳에 있다. 어쩌면 황금의 탑은 내게 그들을 잊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 앞에 있는 책상을 더듬거려 전화기를 찾았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 명함이 보였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통화를 시도한 끝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올라? 안에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 무덤덤하게 전화받던 이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다. “아, 그냥 그대로 기다려주세요. 곧 가겠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제야 깜깜하기만 하던 곳에서 유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8세기 세비야 항구 모습이 그려진 대형 액자, 항해 도구들, 범선의 모형들, 원형 벽면을 빼곡히 두른 작은 액자들 등, 30분이 지날 즈음 마침내 성문이 열리고 뚱뚱한 체구의 관리인이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났다. 내게 백배사죄한다. 내가 좀 큰소리쳐도 될 분위기였다.
돌아다보니 아름답기 그지없는 감옥이다. 멀리 떨어진 다리 위에서 한참 놀라 뛰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다리 건너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켰다. 붉은색의 짙은 흙 내음 가득한 에스프레소는 세비야의 황금의 탑 탈출기를 오래오래 기억하기에 충분했다.
박종만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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