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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15 18:02 수정 : 2012.02.15 18:02

김승배(70)씨

[매거진esc] 길위의 사람들

지난 11일 오전, 바다경치 호수경치 두루 아름다운 강원 고성 화진포. 김일성도 이승만도 이기붕도 별장을 지었던 곳이다. ‘김일성 별장’ 들머리 텅 빈 주차장으로 ‘차량’ 한대가 느릿느릿 굴러들어온다. 두 바퀴 달린 손수레, 운전자는 낡은 야구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다.

‘잡상인·불량식품 사지도 먹지도 맙시다’ 팻말 앞에 ‘차’를 대고, 짐보따리를 풀어 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엿판이다. 나주배 상자에서 엿들이 쏟아져나왔다. 큰엿·작은엿, 땅콩엿·옥수수엿을 꺼내 손수레 위에 늘어놓으신다.

“이게 다 시간 보내기지. 세월 보내기. 다 이렇게 흘러가잖소.” 전남 나주가 고향인 김승배(70·사진)씨. 하늘은 해맑아, 흐르고 뭉치는 구름 한 점 없이 푸른데, 김씨 손수레엔 끈적끈적한 세월이 엿처럼 뭉쳐 있다.

젊은 시절 “먹고살기 위해” 고향 떠나 전국을 흘러다니다 30년 전에 고성군 대진에 정착했다. 떠돌아다니는 동안 공사장 막일꾼, 건자재 수집·판매, 면사무소 잡일, 군청 허드렛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온 거지. 길에서 청춘 다 보내고.” “걸리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일하고 벌어서” 삼남매 키워 내보내고, 2년 전 “니야까 하나 장만하고, 엿가위 하나 얻어” 엿장수로 나섰다. “한시간에 하나도 팔고, 대여섯개 나가기도 허고. 사람 많으면 더 기다리고, 없으면 집에 들어가고.”

김씨의 녹슨 ‘니야까’ 안엔 빗자루 하나, 커피물 끓이던 그을린 주전자 하나, 다 떨어진 거적때기 하나가 들어 있다. 집으로 들어갈 땐 손수레를 주차장 주변 기둥에 단단히 묶어둔다. 얼마 전까지 커피도 팔아봤지만, 벌이도 신통찮고 성가셔서 그만뒀다. 점심은 “집사람이 청소일 나가면서 싸준 도시락”으로 때운다.

버스가 한대 들어오자, 김씨가 큼직한 엿가위를 꺼내더니 공격적인 판매에 나섰다. “챙그랑 철컥철컥….” 아이들 손을 잡은 부부가 슬쩍 보고 지나가고, 젊은 연인 몇쌍이 힐끔 보고 지나간다. 관광객 10여명이 바닷가 쪽으로 다 지나가자, 할아버지는 엿가위를 내려놓고 점퍼 주머니에 언 손을 집어넣었다.

“요즘 애들이 뭐 엿 먹을 일 있겠수? 먹을 게 쌨는데…. 으른들이나 추억 때문에 사먹지.”

이윽고 ‘으른’ 몇이 “엿이다!” 하고 다가왔다. “이빨에 달라붙지 않아요?” 50대 아주머니 넷이 땅콩엿 두 봉지를 집어들었다. “잡숴봐요. 쫌 달라붙었다가두 금시 떨어지니깐.”

팔리는 걸 보고 나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졌다. 발걸음을 떼자 할아버지가 팔을 잡았다. 단단한 가락엿 하나를 집어주신다. 왕곡마을 정겨운 옛날집들 보러 가는 길 내내 할아버지의 엿이 마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다 이렇게 흘러가잖소.”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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