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3.28 17:10 수정 : 2012.03.28 17:10

백상현 제공

[매거진 esc] 유럽 소도시 여행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변 와인 마을 슈피츠

독일 남부에서 발원한 도나우강은 오스트리아의 평원을 관통해서,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 등 동유럽의 여러 나라를 지나 동쪽의 흑해로 흘러드는 유서 깊은 강이다. 도나우강을 따라 오스트리아의 멜크와 크렘스 사이 36㎞ 구간을 바하우 계곡이라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강과 계단식 포도밭, 고풍스러운 수도원, 웅장한 고성들, 강변의 소박한 마을들이 어우러진 중세의 풍경은 맑은 수채화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멜크수도원, 뒤른슈타인성, 빌렌도르프 비너스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이곳 ‘바하우 문화경관’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주로 멜크·뒤른슈타인·빌렌도르프·크렘스 등의 마을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멜크수도원에는 10만여권의 장서와 2000여권의 필사본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곳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 소개할 곳은 멜크와 크렘스 중간 지점에 있는 그 이름도 낭만 가득한 도나우 강가의 슈피츠다.

마을을 감싼 산비탈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싼 계단식 포도밭이 아늑하다. 마을 곳곳의 호이리거(해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파는 집) 앞에 쌓여 있는 빈 와인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강을 따라 걷다가 지도에 표시된 대로 산길을 올라 힌터하우스 유적에 서 본다. 그 낡은 성벽에 기대앉으면 슈피츠와 도나우강, 그리고 바하우 계곡의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땀을 식히는 바람의 흥얼거림, 서걱대는 나뭇잎의 화음, 도나우 강물의 합창, 햇살에 영글어가는 포도들의 재잘거림, 활짝 핀 무궁화와 때이른 코스모스의 웃음소리, 온갖 자연의 생동하는 노래가 들리는 언덕에 서 있자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마을을 감싼 포도밭의 제일 높은 곳에 그 옛날 중세의 상인들과 여행자들이 드나들었던 로테스 토어(붉은 문)가 우뚝 서 있다. 벤치에 앉아 슈피츠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대여섯명이 로테스 토어에 올라왔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배낭에서 와인잔을 꺼내들더니 각자의 잔 가득 포도주를 따랐다. 그들은 높이 잔을 들고 건배를 하고서는 슈피츠를 내려다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었다. 인생의 참맛이 바로 이게 아닐까. 한 잔의 와인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도나우강 위로 반달이 솟아났고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과 초록색 포도밭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마을에 하나둘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고 포도밭 사잇길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슈피츠의 대기 속에는 와인 성분이 있는 듯 유난히 향기롭다. 사위에 어둠이 내리고 간혹 불 켜진 가로등들, 건너편 마을에 별빛처럼 드문드문 불 밝힌 집들, 그리고 유화처럼 길게 강물을 가로질러 빛나던 달빛. 며칠 전에 쏟아져 내린 비 때문인지 푸른 도나우 강물이 아니라 흙탕물이었지만,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분명 진흙탕 속 같은 혼탁한 세상이지만 달빛처럼 맑은 마음 은은히 빛을 낸다면 우리는 아름답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저 멀리 호이리거에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노래와 웃음소리가 인생의 찬가처럼 들려왔다.

백상현 여행작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유럽 소도시 여행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