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07 17:26
수정 : 2012.03.07 17:26
[매거진 esc] 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고비·사하라 사막 등 완주한 대한민국 1호 오지 레이서 유지성
그에게는 비릿함이 없다. 그 왜 있지 않은가. 사막·바다·완주·한바퀴·성찰…. 이런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비릿함 말이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그 냄새는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오지만, 알레르기 있는 사람에겐 지근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그들은 허공을 걸어다닌다. 얼핏 보면 엄청나게 신기한 재주 같지만, 자세히 보면 가느다란 피아노줄을 밟고 건넌다. 비릿한 향기에 취한 사람에게는 그 피아노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서론이 길었다. 유지성(40)은 그런 비릿함 없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사막의 아들’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별명이 붙어 있지만 말이다. 그는 ‘오지 레이서’다. 사하라와 고비 사막 등 수백㎞ 사막을 두 발로 횡단하는 레이스를 벌써 10년 이상 해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아웃백 레이스 같은 경우는 그 길이가 무려 560㎞ 정도다. 서울~부산을 갔다가 다시 대전 정도까지 올라올 거리를, 그것도 40℃ 넘는 사막을 하루 60㎞씩 걷고 뛰며 움직여야 한다.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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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일주일 동안 필수장비만 지닌 채 250㎞ 거리의 이집트 사하라 사막을 달리는 ‘사하라 사막 레이스’에 참가한 유지성씨의 모습. 유지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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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런엑스런 대표. 2002년 모로코 250km 완주를 시작으로 고비 사막, 사하라 사막, 아타카마 사막, 남극대륙, 캐나다 다이아몬드 울트라 등 오지 레이스 완주. <하이 크레이지>(2010년), <청춘경영>(2012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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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하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잖아요. 전 그런 거 없었어요. 실연당하거나 사업이 망한 것도 아니고 그냥 회사 다닐 때 리비아에서 일했거든요. 거기서 사막을 많이 보면서 한번 건너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간략한 답을 들으며 ‘나랑 같은 종족’이라는 걸 느꼈다. 나도
(주한미군방송)에서 프로 레슬링을 처음 보자마자 레슬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링에서 사람들이 쾅쾅 떨어질 때마다 그 옆에선 동네 아줌마들이 껌을 맛나게 쫙쫙 씹으며 화투패를 바닥에 쩍쩍 내치고 있었다. 쾅쾅 쫙쫙 쩍쩍. 그 소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난 링을, 그는 사막을 선택했다. 왼발과 오른발이 교차하며 각각 모래와 링 바닥을 밟으며 삶과 죽음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곳을 자청해 들어갔다. 난 이런 부류를 잘 안다. 그곳의 삶에 영혼의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도피도 아니다. 우린 그저 눈이 먼 것뿐이다. 그에게 사하라와 고비 사막 사이의 선택은, ‘빅맥’과 ‘와퍼’ 햄버거 사이의 선택과 같을 뿐이다.
“그냥 재미죠, 재미. 저한테 사막은 그냥 살짝 위험한 롯데월드 같은 거죠.” 극한 상황에서 느끼는 영혼의 평안함은 대부분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 있다. 반복된 고통의 스트레스가 생기면, 뇌는 이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엔도르핀은 엔도저너스 모르핀의 줄임말. 즉, 뇌 안의 모르핀으로 일종의 환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경험은 상업적으로 포장되기 일쑤다.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사막을 건너가보고 싶었어요”
“사막이 재밌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전 1등을 원하지 않아요. 레이스라고 하지만 전 사막에서 달리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항상 여유가 있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순위가 아니라 완주에 목표를 두니까요.” 1등을 포기하니까 99가지 즐거움이 생긴단다. 그는 캐나다에서 처음 오로라를 봤다. 쩍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듯 신음소리를 내더니, 하늘 위로 영화 <천녀유혼>의 여주인공 왕조현이 옷섶으로 비단길을 풀어내듯 하늘에 길이 열렸다고 했다. 그걸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다시 자신이 내는 감탄사에 몸을 떠는 이 감정의 고조는 1등을 생각했다면 아마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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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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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사진 왼쪽) 출발선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수백명의 참가자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그 앞에서 쭈그리고 캠코더를 들고 있었다. “이게 저예요. 저도 명색이 참가자인데 다른 사람 출발하려는 모습을 찍고 있는 거죠. 우하하.”
그는 사막 레이스의 즐거움을 줄창 이야기했다. 그 모습에서 떠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지난해 여름 철의 여인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지 200여일이 되던 날, 난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앞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사쪽에 의해 삶이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누군가에 대한 저주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들이 나에게 가장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은 자기들이 배를 얼마나 잘 만드는지에 대한 자랑이었다.
철판을 일일이 두드리고 다시 펴는 최종작업은 사람의 몫이다. 일에 대한 자긍심과 엄청난 시간이 만들어낸 업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업력은 다른 사람은 흉내낼 수 없다는 측면에서 초능력에 가깝다. 그도 이런 초능력에 가까운 업력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 사막을 뛰어다니며 그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바로 힘 빠진 다른 참가자들에게 물통을 건네며 했던 “아 유 오케이?”(Are you OK?)였다. 그는 이런 노하우를 잘 정리해서 블로그나 브런치 모임에서 모두 공개했다. 이른바 영업비밀을 모두 까발린 것이다. 자신의 전문적 정보를 공개해서 전체 규모를 키우는 것이 진짜 마니아의 사명이라 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이쪽을 더 키워볼 생각이에요.” 그를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는 최근 <청춘경영>이란 책을 냈다. 사막에서의 경험을 담은 아주 노골적인 자기계발서다. 대개 책을 낸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이런 인터뷰 기회를 홍보의 장으로 살리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는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책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청춘경영이란 단어가 혀에서 맴돌았지만 억지로 커피를 마시며 다시 꾹꾹 몸 안으로 집어넣었을 것이다. 내가 혹시 그 소릴 들을까 걱정하며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잘 알지. 나랑 ‘같은 종족’이니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동족 상봉의 기쁨. 난 그의 자존심을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결코 책에 대해서 묻지 않았고 우린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김남훈 프로레슬러·육체파 지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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