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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네팔·인도·캄보디아 어린이들을 위해 17개의 도서관을 만든 사진가, 김형욱
대학시절 에베레스트 올랐다자식 교육 걱정하는 셰르파 말에
책 사기 위해 그길로 내려와 프로레슬링의 세계에는 선역과 악역이 있다. 나쁜 놈은 좋은 놈의 대척점에서 상대를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맞고 때리는 액션 오페라. 이처럼 링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지만 링 밖의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다. 개인의 가치관과 조직의 이익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얽혀 누가 누군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착한 사람에게 열광하기도 하며 아주 나쁜 사람에게도 큰 관심을 갖는다. 책을 모아서 도서관을 만들자는 희망의 책꽂이 행사에서 사회를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준 엽서에는 직접 찍은 네팔 어린이의 미소가 가득했다. 김형욱. 그는 이 땅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의 어린이들을 주제로 사진을 찍고 또 아이들을 위해 17개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건강을 잃고 작년엔 사경을 헤맸다. 도대체 이 청년의 가슴을 그쪽으로 뛰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5월의 끝자락, 서울 광화문의 카페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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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작가(오른쪽)는 세계 오지 어린이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어린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김형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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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내주는 분들이 계세요.
수중의 담뱃값 털어 보내는
분도 있죠” 그는 대학 때 산악부였다. 에베레스트 등정까지 꿈꿨으나 건강 때문에 정상까지는 엄두를 못 내고 베이스캠프 언저리에서 지원을 하기 위해서 네팔로 갔다. “그래도 에베레스트 등반팀에 속했으니까 꿈을 이뤘잖아요. 그것만으로 행복했죠. 물론 직접 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약간의 아쉬움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저희를 도와주었던 셰르파가 있었는데 짬이 날 때 물어봤어요. 꿈이 뭐냐구요. 그랬더니 자식이 있는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때 그냥 맘이 아팠어요. 좀 많이요.” 서로 걱정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습자지처럼 얇은 유대감을 확인하는 짧은 잡담. 원래 그렇게 끝났어야 하지만 이 대화는 그의 가슴을 후벼파 잠을 못 이루게 했다. “등반대 형들한테 떼를 쓰다시피 해 돈을 모았죠. 그러고선 전 책 사러 간다고 나와버렸어요. 거기서 인도까지 들어갔죠. 셰르파의 아이들에게 줄 영어책을 사기 위해서요.” 기상천외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그는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몇년 후 네팔과 티베트 그리고 인도를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의 웃음을 담으며 다시 이때의 기억이 떠오르게 된다. “아이들은 행복해요. 하루 24시간 중 자는 시간과 엄마한테 혼나는 시간을 빼면 15시간을 웃으면서 살지요. 그런데 부모들은 달라요. 가난의 대물림을 두려워하고 그 원인이 바로 교육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뭐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니까 모두들 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는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주는 사업을 시작한다. 학교당 도서관 하나에 영어로 된 책 1000권씩, 그리고 학생들이 쓸 사전은 모두 한권씩. 그는 한국에 돌아와 방에 굴러다니던 명함을 모아서 친하고, 별로 안 친하고를 가리지 않고 메일을 보냈다. 영어로 된 책을 보내주거나 돈을 보내달라고. 전송 버튼을 누르고 약 십분 뒤부터 얼굴이 화끈해져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런 스팸메일 같은 것에 혹해서 돈을 보낼 리도 없거니와 괜한 짓을 했다는 자책 때문에 한숨만 쉬었다.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책이 도착했다. “그때 메일을 보고 아직까지도 책을 보내주는 분들이 계세요. 놀랍고 고마울 따름이죠.” 이렇게 모은 책으로 네팔에 15개, 인도와 캄보디아에 각각 한 개의 도서관을 세웠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리고 선한 행동. 매스컴에서 이런 사람을 놔둘 리 없다. “신문 인터뷰는 많이 했는데 텔레비전은 좀 골라서 나가야 했어요. 대부분 원하는 게 눈물의 신파극이더군요. 저는 아이들이 결코 불쌍해서 도와준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조금 나누자는 것뿐이거든요.” 동정에서 시작된 선의. 나쁘지 않지만 방향을 잃기도 쉽다. 동정은 자신의 만족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생은 대차대조표와 같다. 차변과 대변이 있고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있다. 성취감과 빈곤 사이에서 각자의 회계기준에 맞추어 선택을 하면 인생의 복식부기 장부가 조금씩 두툼해진다. 이제 30대 후반의 영역에 진입하는 그의 장부는 어떨까. “작년에 7년 만에 고향에 가서 명절을 아버지와 함께 보내려 했는데 갑자기 제가 쓰러졌어요. 장기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래요. 맨날 오지를 돌아다니며 몸을 혹사했더니만 한꺼번에 오더라구요. 그래서 작년엔 꼼짝도 못했어요.” 그는 아프리카 수단의 민중을 위해 헌신한 고 이태석 신부를 다룬 <울지마 톤즈>를 일부러 보지 않았다고 했다. 찍히는 이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 것 같기에 그 감정의 동기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난 그가 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선한 역할을 하는 ‘선역’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세상을 이끄는 것은 힘있는 사람들이다. 힘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인력이 있어 돈과 권력을 끌어모은다. 그래서 세상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헌신을 용기있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전 행복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잖아요.” 그의 기분좋은 너털웃음을 들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일주일 후 그가 다시 네팔로 간다는 문자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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