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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0 17:16 수정 : 2012.06.20 17:16

[매거진 esc] 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영화 ‘부러진 화살’ SNS 언급으로 정직중에 만난 이정렬 판사

선한 인상의 중년 아저씨. 명동의 많은 인파 속에 있다면 그를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만약 그와 내가 링에서 만난다면 내가 그를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만약 법정이라면. 난 그의 입에서 어떤 음성신호가 나올지 내 모든 뇌세포를 사용해 추정하며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판사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판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 6개월간 포털 뉴스 검색을 하면 무려 655건의 뉴스가 검색이 된다. 게다가 현재 4개월째 정직상태인 점을 고려하면 거의 대선주자급이다.

그를 만나던 지난 13일 검찰은 민간인 사찰 수사 발표를 했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선 딸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여인이 드디어 32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법과 법이 가진 한계에 대한 이야기로 에스엔에스(SNS)가 뜨거운 날 서울 명동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서류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런데…재판정에 들어왔을 때
너무 예쁜 거예요”

이정렬. 박미향 기자 제공

profile

이정렬

1969년생.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 현재 정직 4개월중. 카카오톡 대화명 순정마초. 트위터 대화명 백수판사 이정렬.

“사법시험 합격한 것은 23살 때였죠. 그전에요? 항상 전교 1등이었죠. 서울대 법대가 284명 정원이었는데 전국석차 217등이라 눈치작전 없이 그냥 지원했어요. 사법연수원에서는 50등 했어요.” 이정렬은 개체수가 지리산 야생반달가슴곰 30마리보다 적은 나(국내 현역 레슬러 10여명)를, 나는 이정렬처럼 공부 잘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서로 신기해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검사는 보편타당함을 좇는다. 피투성이 된 남자 옆에 내가 경기장에서 쓰는 못 박힌 야구배트를 들고 있다면 검사는 나를 유력한 용의자로 볼 것이다. 변호사는 그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쫓는다. 그리고 판사는 이 둘 사이에서 법과 자신의 양심과 판단능력을 믿어야 한다. 여기서 혼란이 온 적이 없었을까?

“왜 없겠어요. 사기사건 피의자가 들어왔는데 서류만 봤을 때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런데…그런데…” 마른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재판정에 들어왔는데…너무 예쁜 거예요. 파란색 수의를 입었는데 그게 무슨 드레스 같더라구요. 허허.” 수컷은 미추로 선악을 구별하는 나쁜 본능을 갖고 있고 이 사람도 남자 맞다. 나도 고발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모자이크 너머로 보이는 각종 학대와 사기의 가해자들이 너무나 평범하거나 준수해 보이는 얼굴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제가 언론에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게 된 계기는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였죠. 그때 저의 판사로서의 태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어요.” 2004년 5월의 일이다. “이처럼 언론이 많은 관심을 갖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아닌 것들도 있죠. 과연 제가 후자에 대해서 얼마만큼 제 노력을 기울였는지 의구심이 들더라구요.” 프로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까지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판사로서는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프로의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 판사는 사건의 서사적인 내용과 개별 인물의 마음속 서정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법정까지 들어오는 사람들은 절박하죠. 그 심정은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일지도 모릅니다. 법원은 하나의 갈등구조의 해결 모델을 사회에 제시하고 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서로 조심하고 양보하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야말로 선과 악의 아마겟돈이죠.” 남편이자 아버지로 살면서 어린이날 차라리 비가 오는 게 좋았단다. 놀이동산 놀러 가자는 아이가 비가 오면 아예 포기하니까. 그렇게 바쁘게 살다가 최근에 갑자기 쉬게 되었다. 영화 <부러진 화살> 관련한 에스엔에스 글이 문제가 된 것이다.

“대학때 공부만 하느라
사회생활이 거의 없었죠
이제야 법원 밖 세계 경험중이죠”

“많이 돌아다녔어요. 전 대학 때도 공부만 하느라 대학이나 사회생활 경험도 거의 없었죠. 법원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 이 기회에 좀더 알아보고 싶었죠. 방송사 파업 현장도 갔고 국민일보사도 가봤죠.” 혹시나 걱정이 되어 다시 물으니 기사로 써도 된단다.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 참관하러 간 것이라고. 그런 관점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데 갑자기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너무 엄혹하게 느껴졌다.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은 강정이랑 어버이연합이었어요. 특히 어버이연합은 어르신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죠.” 그는 정직기간에 더 많은 뉴스가 나왔다. 이젠 너무 얼굴이 팔려서 개인 자격 참관은 힘들 것 같다고 살짝 웃었다. 판사는 고된 직업이다. 두꺼운 커튼을 열고 녹슬어 잘 움직이지 않는 창문까지 열어 나타나는 진실은 눈부실 수도 있고 너무 눈부셔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판결은 진보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탈북자들을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서 여권을 위조했던 공문서 위조에 대해 내린 선고유예 같은 지금의 보수파들이 환영할 만한 판결도 있었다. 어쩌면 그는 계속 그 자리에서 있었을 뿐인데 오히려 우리가 좌우를 부지런히 오가며 재단한 건 아닐까. 그는 돈키호테 판사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했다.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돌출행동으로 중세 봉건제의 허위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정렬은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건전한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공수가 다르다. 그의 사건 합의율이 80%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지옥으로 같이 떨어지자며 원수로 들어온 사람들이 그래도 한숨이라도 쉬며 악수하고 나선다. 그런 점에서 풍차를 향해 돌격하던 돈키호테를 말리던 돈키호테의 시종 산초가 아닐까. 산초는 종종 미욱한 존재로 희화화되지만 매우 철저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판결을 이해시키고자 몇 배의 판결문을 쓰는 이정렬도 그런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산초의 풀네임은 ‘산초 판사’다.

김남훈 프로레슬러·육체파 지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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