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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0.17 17:37 수정 : 2012.10.17 17:37

프로레슬러 김민호, 사진 박미향 기자 제공

[매거진 esc] 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WWA 소속된 국내 유일 20대 프로레슬러 김민호

우리나라에는 약 2천명의 판사가 있다. 그리고 300여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대개 개체수가 적을수록 더 존중을 받는 법. 그런 식으로 따지면 국내에 있는 현역 프로레슬러는 12명 남짓이니 대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할까? 내가 링에서 후방낙법을 처음 했던 것이 2001년. 그때부터 어림짐작해봐도 프로레슬러의 개체수는 줄어들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드름투성이 애송이가 쭈뼛쭈뼛 도장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얼굴에 사인펜을 칠하고 얼티밋 워리어를 흉내내는 꼬맹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애송이는 계속 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고 어느새 데뷔전까지 했다. 세계레슬링협회(WWA)에 소속된 국내 유일의 20대 프로레슬러 김민호. 지난 5일 경기도 일산의 협회 사무실 인근에서 만나봤다.

profile

김민호 1987년생. 183cm, 98kg. 2006년 입문, 2008년 4월30일 vs 이토 아키히코(노아)전으로 데뷔.

“데뷔전 때 어머니가
경기장에서는 아무 말 없으셨는데
집 앞에서 엉엉 우시더라고요”

“프로레슬러의 몸은 자동차 범퍼와 같아야 한다. 충격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해.” 박치기왕 김일이 살아생전 항상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다. 범퍼는 강철 프레임 위에 고무를 덧대어 만든다. 내가 처음 봤던 김민호는 183㎝의 키에 체중이 140㎏을 훌쩍 넘는 고도비만이었다. 범퍼로서의 기능이 의심스러운 상황. 그러나 지금은 훌륭한 하드웨어를 갖추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요. 기초훈련으로 푸시업 300개, 복근 500개, 스? 1000개, 그리고 맨손운동 3시간에 웨이트 2시간까지.” 엄청난 훈련량이다. “계속 이렇게 하니까 첫달에 20㎏이 빠졌고 다섯달 만에 45㎏이 빠졌어요.” 안 힘들었을까?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죠. 그때 아직은 1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요. 아마 지금 다시 한다면….” 우연이라는 삶의 변수는 어떤 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본 운동이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외엔 해본 것이 없다는 김민호는 9살 때 세계레슬링연맹(WWF) 프로레슬링을 접하고 또래의 아이들처럼 레슬러가 그려진 책받침을 모으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2006년 도장의 문을 두드린다. 안 힘들었을까?

“힘들었죠. 하지만 빨리 링에 올라가고 싶었어요. 텔레비전으로 보던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죠. 전 덩치는 컸지만 소심했고 당시에 집안형편도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링이란 건 그런 제가 한꺼풀 벗고 새로 태어나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링 안의 남자들은 링 밖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 가로세로 7m 공간은 상처받은 맹수들에겐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데뷔전은 경기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경기를 보시고 아무 말 없으셨는데 집 앞에서 갑자기 엉엉 우시더라고요.” 링에서 싸우기로 결정한 남자들은 이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온몸을 휘감는 물리적 통증보다도 더 가슴을 후벼파는 눈물 흘리는 가족의 모습. 탁월한 하드웨어와 외모까지 갖춘 그는 연맹에서 에이스만 보내는 일본 메이저 단체의 유학길에도 오르게 된다. 전례가 없던 대우.

“비행기 타고 도착한 날부터 매일 토할 때까지 운동했어요. 외국인이니까 빨리 쫓아내려고 더 힘들게 시키는 것도 있었고요.” 생애 첫 외국생활에 가혹한 훈련까지. “일본은 동네마다 조그만 하천이 많이 있잖아요. 거의 매일 뛰어내리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힘들었어요.” 어떻게 풀었을까? 그는 짧게 대답했다. “엄마요.” “엄마?” “엄마한테 매일 전화했죠.” 멋쩍게 웃는다. “엄마는 제가 하소연을 하면 저보고 ‘미친놈’이라고만 하셨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으면 힘이 나더라고요.” 일본에서의 혹독한 무자수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 그는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바로 대선배이자 스승인 노지심 관장이 그를 직접 지도하기 시작한 것.

“일종의 부흥 이미지잖아요
부당한 일 겪는 사람들에게
잠깐이나마 즐거움 주면 좋죠”

“아마 제가 끝까지 버틸 거라고 생각은 안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버티고 돌아오니까 그때부터 진짜 자기 새끼라고 생각하시고 지도를 해주시기로 한 거죠.” 성층권에서 사람이 자유낙하로 음속을 돌파하는 것을 자기 방에서 스마트폰 생중계로 보는 세상이지만 이쪽 세계에서의 룰은 바뀐 적이 없고 바뀔 것 같지도 않다. 고통을 견디고 열정을 증명하라는 것. “훈련하는 모습을 캠코더로 촬영해두었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까 제가 링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혼잣말로 ‘쟨 될 거 같다’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될 거 같다, 그 한마디에 갑자기 엉엉 폭풍눈물을 흘렸죠. 그동안 고생했던 것에 모두 다 이자까지 후하게 쳐서 돌려받는 것 같았어요.”

그는 수레바퀴처럼 계속 앞으로 돌면서 자기 스스로를 성장시켰다. 그 성장의 결과물은 그에게 강인한 육체와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정신으로 이어졌다. 그는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면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아이들을 돕는 일에도 참가했고 한국방송 새노조가 집회를 열었을 때 방송국 앞에서 ‘위문경기’를 했던 적도 있었다. 링과 펜스라는 기본적인 경기장비도 없는 시멘트 바닥과 200여명의 새노조원들 앞에서 그는 왜 경기를 펼쳤을까? “전, 사실, 정치나 시사 이런 건 잘 몰라요. 그런데 트위터를 하면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나 케이비에스 새노조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도울 수 있는 걸 찾아봤는데 전 레슬러잖아요. 그럼 시합을 보여줘야죠.”

근육이 울퉁불퉁하지만 심성이 곧지 않은 사내들은 종종 ‘한놈만 걸려라’라면서 자신이 맘껏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약자를 찾는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표현처럼 사상이 울퉁불퉁한 남자는 그렇지 않다. 김민호는 근육과 사상까지 울퉁불퉁한 남자다. “프로레슬링이 원래 갖고 있는 이미지가 일종의 부흥이잖아요. 일본에선 패전 후의 사람들에게 역도산이 그런 에너지를 심어줬고, 우리나라에선 김일 선생님이 그랬죠. 제가 그 정도 스케일까지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부당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잠깐이나마 경기를 통해서 즐거움을 준다면 좋지 않을까요.”

선과 악, 거짓과 진실이 씨줄과 날줄로 얽힌 액션 오페라 ‘프로레슬링’. 그는 정말 이 세계에 잘 어울리는 남자다. 아마 조만간 프로레슬러인 나와도 제대로 된 경기를 하지 않을까? 그때를 대비해서 나도 운동을 좀더 열심히 해야겠다. 몸 좋은 후배한테 계속 얻어맞기만 하는 건 좀 창피할 테니까.

김남훈 프로레슬러·육체파 지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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