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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2.26 17:09 수정 : 2012.12.27 15:49

남상웅씨

[매거진 esc] 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프로레슬링·주짓수·킥복싱 등 격투기 모든 종목에서 싸우는 남상웅씨

“형 괜찮아요? 아유 씨×.” 옆에 있던 사내가 날 흔들며 얼굴을 찌푸렸다. 덜컹거리는 구급차에 누워 몸으로 느끼는 강남구 삼성동의 도로 포장 상태는 비교적 괜찮았다.

나는 코엑스 지하에 있던, 패밀리레스토랑과 격투기 경기장이 결합된 신개념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하다가 쇠기둥에 얼굴을 들이박았고 그 반동으로 뒤로 튕겨 나가며 얼핏 본 것 같았다. 산산조각이 난 채 튀어나가는 앞니와 잇몸조각을. 2003년의 겨울. 새해가 시작된 지 3일 만에 난 응급실로 실려갔고 당시 협회는 나에게 택시비 2만5천원만 쥐여준 채 병원을 떠났다. 그때 ‘형 괜찮아요’를 연발하며 내 옆에 있던 이가 바로 남상웅 관장이다.

참 오랜만에 2012년 12월20일 광화문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남 관장은 캐치레슬링, 프로레슬링, 주짓수, 킥복싱, 종합격투기 등등 사람과 사람이 룰이 있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이라면 빠짐없이 출전한 사람이다. 그가 격투기에 빠진 이유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다.

profile

남상웅 1980년 1월생. KPW 준우승, 그랩 캐치레슬링 우승, 아시아태평양 주짓수 챔피언십 은메달, 인터내셔널 주짓수 챔피언십 동메달. 2012년 주짓수 블랙벨트 승단. 현 그래플러 팩토리 관장.

“그냥요. 그냥 좋은 거 있잖아요.”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이다. “동네가 시골이라 합기도 도장 하나 있었는데 여유가 없어서 다닐 수가 없었어요. 서울 나가는 아버지한테 쿵후 교본을 사다달라고 했고 그걸로 마당에서 혼자 운동했죠.” 그는 체육관에 찾아가 허드렛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관장님에게 운동을 배웠죠. 나중에 그게 직업이 될 줄 몰랐어요.” 군 제대 뒤 마침 이종격투기 붐이 국내에 막 일었다. 그는 이미 사범 타이틀을 갖고 있음에도 여러 종류의 무술 도장을 찾아다니며 수련을 계속한다. “모르는 게 있으면 배워야죠. 저는 어디든 제가 먼저 찾아가서 배웠어요.”

도장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실전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무술에 대한 접근도 있었지만 몇 푼 안 되는 파이트 머니도 그에게는 아주 절실했던 것. “삼촌들이 절 앉혀놓고 포기하라고 하는데 너무 야속했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와 나는 코엑스 지하에서 만났다. “형도 경험하셨잖아요.” 강인한 수컷의 눈에서 잠깐 힘이 빠진다. “우리 원래 한달에 250씩 받기로 했는데 받아보니까 무슨무슨 명목으로 다 빼고 100만원 살짝 넘는 돈 받았잖아요.” 숫자까지 기억하고 있다. 운동만 하면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기억은 조각칼로 음각하듯 오래 남는다. 나는 선수들을 ‘선동’해서 집단이탈을 했고 덕분에 제명당했다.

쿵후 교본 보며 독학
체육관에서 허드렛일하며
격투기 세계 입문

“그때예요. 제가 직접 도장을 차리기로 생각한 시점이.” “왜?”라고 다시 물어봤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어떤 거점을 직접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그래플러 팩토리라는 도장을 1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최근엔 종합격투기 최강의 무술 중 하나로 꼽히는 주짓수의 블랙벨트까지 따냈다. 국내에 열명 정도밖에 없는 블랙벨트 소유자다. “제가 관장이니까 관원들에게 제대로 본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블랙벨트 승단까지 무려 12년이 걸렸다. “조금 빨리 하는 편법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한번 그렇게 하면 되돌릴 수 없어요. 어떤 일이든 시간을 통해서 경험과 기술을 누적시켜야 하는데 그걸 그냥 편법으로 지나가 버리면 제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겠어요?” 그는 일년에 서너번씩 타이로 건너가 무에타이 수련을 하고 2년에 한번씩은 브라질로 가서 두세달씩 주짓수를 수련한다. 이미 체육관과 관장이라는 기반이 잡힌 사람으로서는 보기 힘든 행태. “관원 들어오고 안정되면 사범한테 맡기고 자긴 놀러다니고. 이런 걸 많이 봤죠. 하지만 이 세계에서 관장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안 그러면 결국 도태되고 말죠.” 남 관장은 야생동물 같은 사람이다. 야생동물은 자기 영역의 확장이 바로 자신의 삶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남 관장은 확장에만 신경 쓰다가 젊은 야생동물에게 자리를 내주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한다. 철두철미하다.

“브라질에서 마르코 바르보사 마스터에게 사사했어요. 무제한급 대회에 나갔는데 저만 동메달을 땄어요. 제가 65㎏이었는데, 90~120㎏들이 금, 은을 땄더라구요. 원래 이렇게 체중 차이가 나면 나가면 안 되거든요. 다치니까.” “그런데 왜 나갔어요?” “바르보사 체육관 동문들이 다 깨진 거예요. 아 그거 보고 열불이 좀 나서.” 이 남자 상남자 맞다. 남 관장의 분투하는 모습을 본 마스터는 면밀한 심사 끝에 그에게 블랙벨트를 수여하기로 한다. 다른 무술과는 달리 주짓수는 단이 없다. 블랙벨트는 마스터에게 직접 수여받으며 그것은 마스터와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블랙벨트가 2m40㎝ 잖아요. 12년 걸렸으니까 1년에 20㎝씩 만들어나간 거죠. 휴.” 그의 한숨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의 증기 같은 열기가 느껴진다.

“브라질에서 블랙벨트를 받았는데
한국에서 두르려니까 어색해요.
도장에서 혼자 둘러보니
기분 죽여줬죠, 하하하”

“블랙벨트를 받긴 받았는데 이걸 한국에서 허리에 두르려니까 너무 어색한 거예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은 안 하다가 주말에 도장에 혼자 있을 때 한번 쓱 둘러봤죠.” 어땠을까? “죽여줬죠. 으하하하하하.” 시간과 노력이라는 변수가 정당한 함수관계를 통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냈을 때. 남자는 이렇게 웃는다. 그는 서각과 전각에도 일가견이 있다. 취미 삼아 입문을 했다가 지금은 매년 각종 대회에 출품하고 입선은 물론 대상을 받은 적도 꽤 있다. “블랙벨트 받고 나서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는 사자성어를 서각으로 만들어서 도장에 걸어놨어요.” 수적천석. 작은 물방울도 계속 떨어지다 보면 바위를 뚫는다는 뜻. “제가 블랙벨트를 땄다고 해서 바위를 뚫은 것은 아니예요. 이거도 하나의 작은 결과겠죠. 계속 공부하고 운동할 겁니다. 멈추지 않구요.”

21세기는 소위 청춘들에게 스펙의 시대다. 그 어떤 오차 없이 기준을 통과하면 하나의 자격이 주어지고 그것은 그 사람의 스펙이 된다. 스펙으로 짜맞춰진 사람은 잘 만들어진 모델건이다. 약간의 빈틈도 없고 뒤틀림도 없다. 그러나 모델건은 플라스틱 비비탄만 쏠 수 있을 뿐 화약이 탑재된 진짜 총알을 쏘지 못한다.

남 관장은 투박하고 상처난 권총 같은 사람이다. 진짜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실총 말이다. 그런 실총이 모델건의 정밀함까지 갖추려 하고 있다.

김남훈 프로레슬러·육체파 지식노동자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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