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2.20 17:46 수정 : 2013.02.20 17:46

전찬열씨.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profile

전찬열
전찬열 1992년 세계청소년대회 금메달. 전국체전 7회 우승. 체육훈장 포상증(김영삼 대통령 수여). 2003년 6월초 코리안 탑팀 창단.

가혹한 훈련. 학대에 가까운 규율. 이런 비이성적인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난 자긍심을 심어줄 때도 있다. 내가 프로레슬링 신인 시절에도 그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면서도 뭔가 해냈다는 엉뚱한 상황 인식. 그것은 때때로 만용과 연결이 되곤 했다. 적어도 내가 서울 체육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땐 그랬다.

십여년 전 서울 모처에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 출신들이 운영하는 체육관이 있었고 제법 명성이 알려져 있었다. 체계적인 운동을 배워보자는 생각 반, ‘도장 깨기’라는 생각 반이었다. 거기서 전찬열을 처음 만났다. 딱 벌어진 어깨에 다부진 느낌. 하지만 난 더 큰 서양 레슬러도 겪어봤다. 잠깐 몸을 풀고 스파링을 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점수를 세기도 힘들 정도로 일방적으로 나는 메쳐지고 고꾸라지고 내팽개쳐졌다. 분명 키도 크고 체중도 더 나가는데 꼼짝할 수 없었다. 미군부대 기지촌에서 왈패들과 소년 시절을 보낸 나는 세상의 질서를 잘 알고 있었다. 운동시간이 끝나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야, 우리 친구로 지내자.” 전찬열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그는 코리안 탑팀이라는 격투기팀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세계 최고의 격투기 단체인 유에프시(UFC)에 선수 여러 명을 배출했다. 진짜 지긋지긋할 정도로 강한 수컷 전찬열을 오랜만에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났다. 2월16일이었다.

그는 원래 씨름을 했고 소년부대회에서 곧잘 우승했다. 4학년께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아마 레슬링을 권유했고 그것은 그의 인생이 되었다. 길을 걷다가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기립을 해야 하던 시절. 선생님 말씀은 법이었다. 다행히 그의 ‘인생의 결’과도 잘 맞았다.

세계적 격투기 선수들
배출한 전찬열
어린 시절 씨름하다가
아마 레슬링으로 종목 바꿔

“처음 국제대회에 나갔던 기억이 나요. 미국이었는데 외국 선수들이 제 가슴의 태극마크를 보고 펩시 소속이냐고 그러더라고요. 88올림픽 이후였지만 아직 어린 친구들은 한국이란 나라를 잘 모르더라고요.” 국위선양이라는 단어, 조금 왼편의 길을 걷는 사람에겐 낯간지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이 필요 없죠. 실력으로 이기고 시상대에 올라가서 목에 금메달 걸고 내려오면 제가 사우스코리아에서 왔다는 걸 다 알아요.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는 국내 대회에서만 무려 7년간 우승을 거둔다. 38선 이남에서는 이미 적수가 없는 상황, 국제무대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딱 하나의 목표만 남겨둔다. 바로 올림픽. 그의 20년지기이자 후배인 이용훈 관장은 사석에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선수촌에 있는 사람들 모두 찬열이 형은 금메달 딸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금메달리스트에 그의 이름은 없다. 10년간 지인으로 지내면서도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용기 내어 물어봤다. “목 부상이었죠. 레슬링 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목디스크 부상. 의사는 잘못하면 전신마비가 올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나왔죠. 선수촌을.” 콜타르처럼 찐득한 밀도의 적막감이 우리 주변을 채우는 것 같았다. “선수촌을 나오는 데 뜨거운 눈물이…뜨거운 눈물이…뜨거운 눈물이….” 마치 시디(CD)가 튀듯이 뜨거운 눈물이라는 단어를 계속 반복한다. 나와 직접 교분이 있는 동년배의 남자 중에서 가장 강한 남자도 그때의 아픔은 대단했나 보다. “케이크 좀 먹을래요?”라면서 카운터에 가 주문을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다시 테이블로 왔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색하고 있었다.

올림픽 앞두고
목부상으로 은퇴
코리안 탑팀 창단
강한 훈련으로 유명

그는 코리안 탑팀이라는 격투기팀을 친구인 하동진과 함께 2003년에 창단해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다. 두 사람이 밀고 끌면서 노래하는 파이터 서두원, 코리안 좀비 정찬성, 유에프시 파이터 양동이 그리고 이번에 유에프시에 진출하는 임현규를 길러냈다. 대림역 먹자골목 지하 1층에서 시작한 체육관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성과. “처음 팀을 창단했을 때 우연히 한국에 와 있던 밥 샙의 트레이너였던 미야모토가 밥 샙 이름으로 화환을 보내줬는데요. 사람들이 믿지 않더라고요. 그 정도로 우리가 초라해 보였던 거죠.” 지금 코리안 탑팀은 아시아 최고의 명문팀으로 꼽힌다. “대림동에 처음 체육관 냈을 때 샌드백이 없었던 거 기억나요?” “기억나죠. 샌드백이 없어서 매트를 감아서 펀치 연습을 했던….” “이번에 이사하면서 샌드백을 열네개 달았어요. 내가 아주 한이 맺혀서.” “우하하, 열네개.” 이 남자. 진짜 상남자 맞다. 코리안 탑팀은 강한 훈련을 시키기로 유명하다. 아무리 승리를 바라기로서니 가혹한 상황을 만드는 데 부담은 없을까?

“있지 왜 없어요. 그런데 링에 들어서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맞고 때리면서 피가 나는 유일한 스포츠잖아요. 경기 끝나고 링 안에 들어가면 피가 흥건할 때가 있어요. 그 아수라장에서 내 새끼가 이왕이면 이겨야죠. 맞아서 아픈데다가 져서 끙끙거리는 모습을 어떻게 봐요.” 혹시 이 남자는 마음이 약해서, 자신의 제자가 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어서, 더 강하게 훈련을 시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무가내로 가혹하게 훈련을 시키는 건 아니에요. 그건 학대죠. 낙타 등에 짐을 계속 싣다가 나중에 바늘 하나 올려놓으면 낙타 허리가 부러지는 법이죠. 선수들의 레벨에 맞게 허리가 부러지지 않게 조절을 합니다.” “레벨 측정은 어떻게 하죠?” “제가 직접 (스파링을) 해봐야죠.” 그의 레슬링 실력은 국내 정상급 현역 파이터들도 두려워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훈련 방식은 그에게도 엄청난 부담이 된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젊은 사자도 언젠가는 늙은 사자가 된다. 늙어서도 경험과 전략으로 젊은 사자를 제압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완패를 할 것이다. “(제자와 스파링에서) 제가 진다면….” 잠시 말을 멈춘다. “그건 순리죠. 따라가야죠.” 다시 멈췄다가 이어간다. “하지만 당분간은 어림도 없을 겁니다. 우하하하.” 12년 전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완패를 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내가 형편없는 상대였냐고. 전찬열은 씨익 웃으며 아이스라테를 한 모금 마셨고 헤어질 때까지 답을 해주지 않았다.

김남훈 프로레슬러 육체파 지식노동자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