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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0 18:16 수정 : 2013.03.20 18:16

[매거진 esc] 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profile다카기 산시로 1970년 1월13일생. 일본 오사카 출신. 1995년 프로레슬러 데뷔. 1997년 디디티(DDT) 프로레슬링 창업. 현재 디디티 프로레슬링 대표이사.

다카기 산시로, DDT 프로레슬링 제공
지난 2일 일본 도쿄 신주쿠 프린스호텔 로비. 안쪽 커피숍으로 들어서자 마트에서 파는 냉동만두처럼 둥글면서도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아는 척을 한다. 그의 이름은 다카기 산시로. 현역 프로레슬러이면서 디디티(DDT: Dramatic Dream Team)라는 프로레슬링 회사를 이끌고 있는 대표이기도 하다. 내가 이 업계에 발을 디딘 지 13년간 그처럼 독특한 인물을 만난 적이 없다. 자기 영역의 보존과 확장이라는 ‘수컷’의 테제를 철저히 엄수한 이 사내를 일본에서 만났다.

현역 프로레슬러이자
회사 디디티 이끄는
다카기 산시로

“누구를 동경했나요?” “덴류 겐이치로(스모선수 출신의 일본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를 동경했지요.” 다소 의외다. 이 나이 또래의 일본인 남자라면 대개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같은 이들을 좋아했을 텐데. “저는 2등이 좋았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1등을 뛰어넘을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있는 존재 말이죠.” “그림자가 있는?” “맞습니다. 그림자가 있는 히어로 말이죠.” 링을 선택한 이들은 대개 그렇다. 링 안의 박진의 삶에 영혼이 구심력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는 프로레슬러가 되기 위해서 고등학교 때 유도선수로 활동하고 이후 사회생활을 하다가 직접 링으로 뛰어든다.

“데뷔전은 어땠나요?” “아시잖아요?” “네, 저도 잘 알고 있죠.” 데뷔전은 첫 경험 같다. 허무하며 너무 빨리 끝난다. 동정의 사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침대에서 그냥 쓰러진다. 데뷔전의 경기 종료를 알리는 3카운트는 너무 빨랐다. 그는 24살 늦은 나이에 데뷔전을 했지만 이듬해 그가 몸을 위탁했던 협회는 파산을 선언했고 선수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그때 그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선수들을 모아서 단체를 만들기로 한 것. 작은 인디단체에서 쫓겨난 선수들이 다시 인디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그때까지의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도였다. ‘독립’이라는 것도 메이저 협회 출신의 ‘족보’ 있는 선수들만 가능했던 시대.

“지하에 있는 디스코텍을 빌려서 대회를 열었고 관객 수도 기억합니다. 250명. 참담한 숫자였죠.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뭐였나요?” “당시 스포츠 미디어들이 전혀 저희를 상대해주지 않았던 겁니다. 전화를 하고 팩스를 보내고 직접 찾아가 인사도 했지만, 관련 기사는 물론이고 시합 결과도 기재해주질 않았어요.” 일본인들은 기억보다 기록을 믿는 사람들이다. 일본에 프로레슬링을 전파한 역도산의 1954년 첫 경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문 매체들은 아무리 사소한 결과라도 깨알같이 기록하고 정리한다. 연감과 연표의 나라에서 기록이 없다는 것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는 것.

“4년 정도 지나자 인정을 해주더군요. 고라쿠엔홀 경기를 성공시켰거든요.” 문득 3년 전에 선수들을 데리고 한국에 원정경기를 왔을 때 시합 결과를 굵은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꾹꾹 눌러가면서 정리해 일본 기자들에게 메일을 보내던 그가 생각났다. 거제도 시합을 마치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전세버스 안에서 말이다. 그때의 한이 좀 남았던 것은 아닐까. 그가 만든 디디티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존재인 안토니오 이노키의 ‘신일본’, 자이언트 바바의 ‘전일본’에 이어서 업계 5위에 드는 규모를 자랑한다. 어림잡아 200개 가까운 협회가 난립하고 있는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이런 성적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제가 착안한 것은 바로 티브이 예능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매주 다양한 주제와 출연진이 색다른 즐거움을 주지요. 그것은 바로 출연진의 캐릭터에 기인합니다.” 탁견이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거리에 내몰린 선수들
모아 일본 5위 단체로 키워
링 내 성과뿐 아니라
선수들 생계도 함께 고민

리얼리티쇼 기반의 선수발굴 티브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디디티의 기반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나의 콘텐츠로 보고 일관된 재미를 추구했던 것이죠.” 이 남자, 자신의 성공철학에 대한 부분이 나오자 쉬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꺼낸다. 그 격정적인 모습에 전혀 템포가 떨어지지 않는다. “후회했던 부분은 없나요?” 칼로 자르고 들어가듯이 질문을 해봤다. “음….” 상당히 긴 망설임이 느껴졌다. “링 위에서 싸우는 에이스는 사실 허상의 존재일 때가 있지요. 현실과 다른. 실제 모습을 보고 실망했던 적이 있네요.” 로프를 넘어서 링으로 들어서는 순간, 링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 되고 판타지의 에이스는 현실의 소소한 이익에도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임을 알아챌 때가 있다. 나도 느껴봤던 배신감. “아! 결코 덴류상이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프로레슬링 대회사를 운영하면서 카레전문점, 선술집, 스포츠바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꼭 돈 때문은 아니다. 바로 선수들을 위해서 운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프로레슬링 단 하나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몇몇 유명 선수들뿐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선수들은 연습이나 경기가 없을 때는 이런 곳에서 직원으로 일하면서 요리를 배우고 급료를 받는다. “열정은 청춘을 착취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전 그런 도구를 쓸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우리나라 열정팔이 멘토와 달리 책임을 지는 어른의 모습이 그의 얼굴에서 보였다. 역시 이 남자 단단하다. “저는 경영자입니다. 제가 만든 디디티라는 회사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경영자입니다. 그리고 디디티 구성원들이 일정 수준의 삶을 살게끔 유지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제 업계에서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명품시계를 손목에 찰 정도로 돈도 벌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일년에 50회 이상 링에서 직접 경기를 하며 때론 홍보를 위해서 링이 없는 시내 한복판에서 노상 프로레슬링도 한다. 전신전령으로 인생과 승부하는 남자가 바로 다카기 산시로다. “디디티에서 ‘드림’은 사실 선수들의 꿈을 뜻하는 거였습니다. 관객에게 꿈을 주는 게 아니라….” “아항.” “어느 날 길거리로 내몰렸던 저를 포함한 선수들이 꿨던 꿈. 프로레슬링을 향한 꿈. 이제 5년 안에 도쿄돔에 진출하는 것이 꿈입니다.”

멋있다. 너무 멋있어서 ‘인터뷰용으로 미리 준비했던 멘트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빠져 있는데 그가 갑자기 카메라를 나에게 들이댄다. “아! 김상, 사진 찍어도 될까요? 기무난뿐(김남훈의 일본 링네임)이 한국의 진보계열 신문기자가 돼서 저를 인터뷰했다는 것은 좋은 홍보 거리가 될 것 같아서요.” 탄식이 나왔다. 정말 이 남자를 이길 방법이 없다.

김남훈 프로레슬러 육체파 지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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