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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15 18:00 수정 : 2013.05.15 18:00

생명의 전화 이명희 상담관, 박미향 기자 제공

[매거진 esc] 김남훈의 싸우는 사람들

국군 생명의 전화
이명희 상담관
잘나가는 영어강사
포기하고 상담가의 길로

“그 장병한테 알려주는 거죠
너를 지켜보고
너를 도와줄 수 있는
끈이 있다는 걸”

군부대 강연을 갔다가 국군 생명의 전화 스티커를 봤다. 군 장병들의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할 텐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담관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주변을 수소문해서 실제로 근무하는 상담관을 찾았고 국방부의 협조를 받아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5월10일 서울 신촌 카페에서 생명의 전화 이명희 상담관을 만났다. 정갈한 외모와 중저음의 목소리. 날씨를 주제로 인사말을 나누는데도 따뜻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특별한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주변은 항상 어떤 질서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그러한 것들이 저를 갑갑하게 만들었죠.” 그는 대학 졸업 후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캐나다로 해외 어학연수를 떠났다.

“아주머님 두 분이 운영하는 홈스테이에 살았는데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어떤 충격이요?” “저희 어머니보다 다섯살 많은 분들이었는데 정말 삶을 즐겁게 영위하시더라고요.”

린다와 폴린 아줌마를 보면서 ‘자신한테 솔직한 삶’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저한테는 장점이 있어요.” “어떤 거죠?”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감하는 장점을 갖고 있어요. 관계중심적이고요.” 자신의 장점을 살린 공부 그리고 상담사를 하고 싶다는 결정을 내리고 캘거리대학교 심리학과에 입학한다. 언어는 관념의 바다다. 언어가 달라지면 바다도 달라진다. 외국어로 사람의 심리를 공부하는 게 어렵진 않았을까. “너무 너무 너무 어려웠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죠. 예습과 복습. 별명이 안방마님이었어요. 맨날 도서관에 앉아 있다고.” 콧구멍에서 잠깐 뜨거운 바람이 나왔다가 들어갔다. 정말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한국에 왔는데 고민이 많았죠. 30대 초반의 나이에 경제생활도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 일반회사에 들어가면 공부가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멈춰버릴 것만 같았어요.”

꿈을 좇는 것은 의지라면 현실은 관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희망에는 두려움이 따라오며 멈추면 다시 움직이기 힘들다는 것을. 그는 일단 모 영어학원의 개인튜터를 시작한다. “제가 담당했던 곳은…타워팰리스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거였어요.” “그 말로만 듣던 부자동네!”

“이 일은 할 만했나요?” “좋았죠. 특히 수입이.” “수입이요?” “월말에 통장정리를 하면 찌리리릭 찌리릭 인자되는 소리가 들리고 딱 펼쳐서 열어보면 꽤 두둑한 수당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입금확인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 아니던가.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원래 제가 하고 싶었던 건 상담이었잖아요. 타인과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과의….” 약간 머뭇거리길래 내가 거들었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도 중요하죠.” “맞아요. 그래서 상담 쪽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대학원에 입학을 하죠.” 튜터와 대학원생을 병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고.

“힘들게 졸업까지 했는데 막상 나와 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고요. 경쟁도 꽤 치열하고. 일단 경험도 쌓을 겸 여중, 여고에 위촉상담사로 들어갔어요. 보수를 받지 않는 일이지만 한 3년 정도 일했어요. 상담자의 롤에 대해서 제대로 실습을 한 거죠. 물론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도 보람있었고요.” 그러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2011년부터 육군 ○○사단 병영생활 상담가로 일을 하게 된다. “사회에서 왕따당한 경험 때문에 군에 적응을 못한 아이가…장병이 있었는데….” 그는 군 장병과 아이라는 말을 혼용했다. “자살시도까지 했기에 관심 사병만 들어가는 캠프로 보내졌어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부드러운 아우라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장병이 상담실로 오면 초콜릿이랑 코코아를 준비했다가 먹이면서 마음을 풀게 했고요. 그런데 큭큭….” 웃음을 참는다. “자기가 무슨 애냐고, 이런 걸 왜 주냐고 버럭 화를 내다가 결국 잘 먹어요. 고맙다고. 하하.” 당분을 거부할 수 있는 육군 사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가 가끔 캠프에 찾아갈 땐 다른 애들 것까지 준비해 갔어요. 그럼 으쓱해가지고…하하.” “아, 그거 초등학교 소풍 때 엄마가 맛난 거 싸주면 어깨에 힘 들어가는….” “맞아요. 그 장병한테 알려주는 거죠. 너를 지켜보고 너를 도와줄 수 있는 끈이 있다는 걸.” 그는 올해 초 국방부 생명의 전화 상담관으로 이직했다. 강원도에서 나와 가족과 가까운 서울에 살게 됐지만 근무 강도는 더 심한 편. 오늘도 아침 7시30분까지 상담업무를 봤기에 인터뷰 시간을 조금 늦춰달라고 했던 그였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타인을 돕고 싶다는 선의에 대한 집념. 뚜껑을 열면 잠깐 동안 향기를 공기 중에 발산한 채 그대로 사라지는 선의가 아니라 끝까지 가겠다는 집념 가득한 선의.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글쎄요. 전 오히려 이런 생활이 행복해요. 불편과 어려움은 분명 있지만 가치있는 일이잖아요.” 링에서 피칠갑이 되도록 싸우고 내려오면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다. 이걸 왜 하냐고. 그럼 난 대답한다. 나한테 맞는 일이라서 하는 거라고.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 일이 그에겐 정말 맞는 것일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눈치를 챘는지 그가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입을 열었다. “이제 (삶을) 그만두겠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면 상담이 쉬운데 착 가라앉아 있으면 찐득하니 시간이 더 걸리죠.” 눈동자가 아래쪽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20분 넘게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그 장병의 장점이 보이더라고요.” “그게 뭔데요?” “일단 자기 상황을 잘 정리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요. 그리고 한번 마음먹으면 해낼 때까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죠. 그래서 그런 장점을 계속 이야기해줬어요. 그리고….” “그리고?” “죽지만 말자고요.” 그의 표정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며칠 뒤에 그 장병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어요. 자기 해보겠다고, 안 죽겠다고 그거 알려드리려고 전화했다고.” 그의 얼굴에서 정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참, 기사에 제 나이는 쓰지 말아주시고요. 대신에 생명의 전화 번호 좀 써주세요.” 그 소원 들어드린다. 080-007-0179, (02)794-0179. <끝>

김남훈 프로레슬러 육체파 지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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