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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07 17:04 수정 : 2012.03.07 17:04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그 남자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우상이었다. 잘생겼고 말도 잘하고 웃기고 운동실력도 뛰어났다. 하물며 두뇌는 명석한데 공부는 잘 안 했고 내킬 때 좀 하면 모두를 앞질렀다. 이러니 어찌 인기가 없을 수 있을까? 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흠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건 나 역시도 당시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진짜? 네가? 에잇 설마”라며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그 남자는 세월이 한참을 흘러 지금 내 앞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키득키득 웃는다. 나는 왠지 마음 놓고 따라 웃지를 못했다. 당시 설사 고백했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 정도는 열다섯 나이에도 이미 알았다. 그는 왕자였고 그의 시선은 ‘프랑스 인형’이라 불리던 또다른 ‘공주’에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25년 전의 그 남자애가 지금 내 앞의 이 남자 어른인지 무척 불가사의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때는 밤새도록 가슴앓이를 하고 그의 아무 생각 없는 한마디에 비수처럼 찔려도 면전에서 아프다는 소리 한번 대놓고 시원하게 못 해봤는데, 지금은 그가 내 딸아이를 내 남편 다음으로 어여뻐하고 내 딸아이도 내 남편 다음으로 그를 따르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대학시절 잠시 친구 이상 애인 미만으로 간을 보다가 끝나기도 하고, 그와 만났다 하면 내 여자친구들이 그에게 홀딱 반하는 것을 꾹 참고 지켜보아야만 했고, 그의 두번의 결혼식에 복잡한 마음으로 축의금을 들고 참석했다.

한때는, 주말 아침 그의 집에서 그의 가족들과 천연덕스럽게 밥을 먹을 때는 잠시 혼자 착각을 한 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또 어떤 날은 그가 동창회에 이혼하고 더 미모가 오른 예의 그 ‘프랑스 인형’을 에스코트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약속 장소에 뒤늦게 등장한 그 잘생기고 예쁜 이혼남과 이혼녀의 빛나는 앙상블 앞에서, 하는 수 없이 돌쟁이 아기를 데리고 밤 외출을 해야 했던 나는 포대기를 내다 버리고만 싶었다. 내가 미쳤지, 그날 왜 난 애를 데리고 나간 거지? 사랑받고 사는 여자의 훈장?

그러나 또 이젠 어쩌다가 지금의 그는 내게 더없이 친밀하고 다정하다. 정성스런 선물도 때 되면 챙겨주고, 일로 도움도 주고, 남편한테는 말 못할 내 비밀이야기도 들어주고, 내 컴퓨터를 고쳐주기도 하고, 온라인으로 대화도 나누고, 우리가 아끼던 추억의 음악도 들려주고, 맛있는 밥을 같이 먹어도 준다.

주변에서 보기엔 각자 결혼을 해도 이렇게 오랜 지기 남자친구가 끔찍하게 챙겨준다며 신기하고 부럽다고도 한다. 나름 그동안 적지 않은 삶의 난관을 거쳐 그가 이렇게 자상해질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미세하게나마 이름이 알려져서? 여자로서 출세했구나 싶다가도 그가 자상해질수록 나는 가끔 어쩔 줄을 모르겠다. 주기만 했던 여자는 받는 것이 이토록 어색하다.

사실 이 글을 써놓고도 그 주에 편집부에 부치지도 못했었다. “나 너에 대해서 글 쓸 거다?”라며 괜히 유치하게 집적대듯 그의 호기심만 자극했다.

내 마음을 알린들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나도 바보는 아니니 그가 영원히 왕자인 채로 박제가 될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결코 영원히 공주가 될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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