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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21 16:59 수정 : 2012.03.30 10:01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일전의 칼럼에서 밖으로 싸우러 나가는 남자들은 여자 옆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며, 여자가 결코 남자의 우선순위가 아님을 절망한 바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와 반대로 치열한 경쟁과 투쟁보다 하루하루 평온히 세상이 주는 아름다움과 기쁨-가령 술과 자연, 춤과 노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여자-을 누리다가 갔으면 하는 남자들도 있다.

가장 가까이서 발견한 그런 예는 우리 아빠였다. 엄마와 아빠는 중학교 때 만난 첫사랑 지간. 고교를 거쳐 대학 가서도 사귀었는데 잠시 엄마가 서울대생과 바람이 나는 바람에 1년간 아빠는 그 여자대학 정문 앞에서 기다려서 마침내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대신 그 열정은 훗날 사랑의 결실로 태어날 3남매에게는 약발이 미치지 않았다. 우리는 주로 대화도 없고 어색했다. 권위적이거나 대화법을 몰라서라기보단 그는 일반적인 ‘부모 노릇’이 그저 체질적으로 싫었던 것 같다. 이날 이때까지 단 한번도 아빠한테 삶의 조언도, 노골적인 칭찬도, 혹은 참견이나 간섭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빠의 존재감은 오로지, 달짝지근한 미남형 얼굴과는 안 어울리는 난폭한 운전솜씨에서만 느껴졌다.

그렇게 멀리서 남처럼 지켜보던 아빠는 직업적으로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진 않았는데 그건 아마 외교관의 해외공관 생활이라는 것이 공과 사가 혼재된, 한 가족처럼 지내야 하는 일터이기 때문에 그랬다. 뱀 같은 공관장한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5공 당시의 군인 출신들한테 승진 자리를 새치기당할 때마다, 그는 과음하고 연상 아내의 치마폭에서 ‘때려치우겠다’를 연발하거나 가끔 그런 채로 가족들을 태우고 음주운전을 했다. 하지만 대개 맨정신일 때는 그도 ‘공무원’ 페르소나를 쓰고 본국에서 보내온 <월간조선>을 충직하게 완독하며 전두환 동생과 찍은 확대사진을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들과 더불어 고이 서랍 속에 보관하기도 했다.

그런 아빠도 막내딸에게 ‘로망’으로 비치던 순간순간이 있었다. 브라질에서 한 부잣집 친구의 근사한 댄스파티에 초대받았을 때였다. 한창 이성에 눈뜰 틴에이저였던 나는 어떻게든 파티에 가고 싶어 안달 나 있었는데 반대하는 엄마와는 달리 아빠가 보던 신문 접더니 대뜸 “내가 데려다 줄게”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약속대로 나와 내 날라리 백인친구들을 한가득 태워 파티 장소에 데려다 주었다. 차 안의 배경음악(BGM)은 아바였고, 아빠는 드라이브 내내 나의 시건방진 친구들을 상대로 살가운 대화를 아끼지 않았다. 으리으리한 대저택 안에 들어서면서도 전혀 주눅 들지도 않았다. 우리 아빠, 짱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그가 비록 우리와 별 대화를 안 나눌지언정 미술관에 가거나 유화를 그리거나 꽃 사진을 찍으러 다닐 때도 너그럽고 평온하고 조금은 눈부셔 보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그저 팔자 좋은 한량으로 태어났어야 했다.

그 사춘기 막내딸도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어, ‘자식들은 없어도 사랑하는 아내 없이는 못 산다’던 그 남자 곁을 지키고 있다. 결국 평범한 아빠 노릇 몇번 못하고 어느새 자식들은 훌쩍 어른이 되고 아내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남자는 늘 그래 왔듯이 자식 눈치 따윈 보지도 않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고 유일하게 찬성했다는 죄로 막내딸은 외로운 로맨스그레이의 연애상담역을 도맡아야만 했다. 하긴 그 남자의 기질을 쏙 빼닮은 게 또 나다 보니 챙기는 건 내 업보였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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