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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4.18 16:59 수정 : 2012.04.18 16:59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내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내가 가진 모든 감정을 상대에게 퍼부었을 때 한 발자국도 뒷걸음질치지 않고 의심 없이 다 기쁘게 받아준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왜냐, 죄다 무섭다고 도망갔거든?

죄다 무섭다고 도망간 그 작자들은 대개가 ‘소심섬세남’들이었다. 내가 시달렸던 그들. 나는 그들이 참 밉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들은 나의 애정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들이었으니까.

소심섬세남은 말 그대로 ‘소심’과 ‘섬세’가 동전의 양면처럼 오락가락하는 남자들이다. 감수성이 풍부했지만 신경질적이었고, 지적이지만 완고했고, 유머감각이 있지만 독을 섞으면 가장 고역스런 비아냥을 뿜었다. 내 마음을 나보다도 더 잘 아는 듯했지만 그만큼 역으로 나의 무심함을 비난했다. 단순무식 마초남들의 센 척이 지겹고 우습게 느껴질 때, 자신의 취약함에 정직한 소심섬세남들이 차라리 더 강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 둔감한 남자는 싫어. 인간은 본래 복잡한 거잖아. 적어도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겠지.

한데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깊은 내면세계를 가진, 어른이 미처 되지 못한 남자들이었다. 그 예민한 감수성의 언어와 몸짓으로 여자를 아득하게 충족시켰지만, 한번 수틀리면 그 깊은 내면세계인지 시커먼 동굴인지로 들어가서 좀처럼 뒤돌아보질 않았다. 딱 제멋대로 응석받이로 자란, 두뇌만은 비상한 소년 같았다. 아무리 달래보아도 좀처럼 나오질 않는다.

그들이 찌질하다 못해 잔인해지는 건 딱 그즈음, 남자의 예민함이 지겨워져서 잠시 회피하고 싶어지는 나의 아주 사소한 머뭇거림을, 촉이 예민한 그들이 포착하게 되면서부터다. 그제야 동굴에서 기어 나와 ‘너만은 나를 이해할 거라 생각했는데’라며 약한 모습을 다 드러낸 걸 이제 와서 후회하며 원망했다. 자신에게 상처 준 건 배신행위니 응징은 당연하다는 듯, 가시 돋은 그 의식을 하염없이 나와의 관계 속에서 질질 끌고 다녀 사람을 확 질리게 했다. 그럼 우리 문제점을 똑 까놓고 얘기해보자 애원해도 남자는 그것을 얼마 안 남은 자신의 자존심을 완전히 난도질해보자고 덤벼드는 도발행위로 치부했다. 이쯤 되면 얘도 어쩔 수 없이 남자구나 싶어 눈 딱 감고 항복선언을 하면 이번엔 또 왜 자기를 바보로 아냐고, 무시하냐고 뭐라 한다. 관계의 우위에 서고 싶지만 주도는 안 하려는 수동공격적인 그들을 보며 속 터져 혼자 참 숨죽여 많이도 울었다. 앞에서 울어봤자 걔들 의심 많아 여자 눈물 안 믿거든?

그럼에도 요새 나는 언제 어떤 예측 불가능한 땡깡을 부릴지 모르는 나의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그들을 생각한다.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도 돼본다. 한창 취약할 때 정곡을 찌를 게 아니라 뭘 해도 그저 품어주고 용서하고 이기적인 욕구에 이런 식으로 응해줬어야 하는구나, 하고. 하지만 다시 하라면 미안. 이기적이라 욕해도 할 수 없다. 나는 지쳤고 내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끌어안아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막상 다시 보면 또 그 예의 완전한 사랑을 꿈꾸고 갈망하는 그 아름다운 눈빛을 저버리긴 너무나 너무나 힘들겠지.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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