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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11 17:01 수정 : 2012.07.11 17:01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지난번 칼럼에 외국 남자 딱 끊어내는 결단력을 자랑했건만 냉정하게 보면 그가 ‘과거’의 남자라 가능했던 것 같다. 왜 굳이 재활용해야 돼, 같은 거만함. 과거의 망령들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다양한 유혹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출근길의 그 사람, 새벽 온라인의 그 사람 등 언제 어디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 빠질지 알 수가 없다.

유혹, 혹은 그에 반응하는 나의 욕망을 잘 다룰 수 있다면 건조한 일상에 적절한 윤기를 주는 ‘약’으로 쓰일 수 있지만 정도 조절을 자칫 잘못하면 그것은 ‘병’이 되거나 ‘화’가 되기도 한다. 물론 본능적으로 우러나는 감정이니 통제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여태껏 시도해 본 마음 다스리는 법 중 그나마 먹혔던 것은 ‘분산투자’였다. 한 사람에게 몰입하기보다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조금씩 마음을 나누고, 쏠림 현상 없이, 그들이 제공하는 제각각의 자원과 매력을 야금야금 취하는 비겁한 방식이었다. 마음을 주는 대상이 감정이 깃든 인간이 아닌 감정이 없는 물질이라면 참 쉬웠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물건에는 도저히 깊이 혹하지 못했다.

아, 가끔은 압도적으로 매력적인, 하지만 확고히 내 것은 될 수 없는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그 역시도 ‘보는 것만으로도’ 목마름을 해소하는 데 꽤 도움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에겐 연예인을 짝사랑하는 마음이 그것이고, 내 경우엔 지난 삼년 반 동안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마성의 남자’와 매주 한번 같이 방송을 할 수 있었던 일이다. 내가 그 기간 동안 사고를 치지 않았다면 그 공은 온전히 그 마른 남자 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꾸 불쑥불쑥 솟는 이 처치 곤란한 그 무엇은 대체 언제쯤 없어질까 싶다. 이제 불혹의 나이를 관통했으니 좀 평온해지고 싶기도 한데. 한 후배는 에로스가 가미된 교감에 대한 욕망은 그 누구에게나 항시 있으며 단지 그걸 겉으로 드러내느냐, 꾹 숨기고 양철인간으로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쇳조각을 씹는 기분이었다.

‘남자들’이라는 노골적인 제목의 칼럼을 처음에 쓰자고 결정했을 때, 내게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첫째, 남자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남자에 대한 욕망을 다스리고 휘발시키고 싶었다. 그 민망한 ‘글로 승화’. 둘째, 과거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앨범 정리 하듯 연민의 감정으로 심정적 졸업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졸업? 전화해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더이상 유혹에 동하지 않고 ‘고요한’ 여자가 되는 시점, 즉 지난 몇십년간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그 욕망 덩어리의 마지막 불씨가 죽어가는 그 순간을 왠지 나는 이 연재 도중에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데 어째, 소기의 목적은 여전히 달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나는 일단 계속 이 지면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니면 혹시 이 칼럼을 쓰기 때문에 여태 번뇌에서 못 벗어나는 건가?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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