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25 17:03
수정 : 2012.07.25 17:03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저 멀리 뒤에는 늘 한 과묵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말을 아끼는 남자였고 슬픔이나 기쁨, 그 어떤 감정도 절제하며 그저 이쪽을 차분하고 섬세한 눈길로 지켜봐 주는 그런 남자였다. 그는 필요한 말만 했고 나머지는 자기 안에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의 빈 말풍선 안에는 내가 바라는 대사로 채워 넣으며 환상을 품을 수가 있었다.
그랬던 그 남자가 음지에서 양지로 건너왔다. 입을 열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많은 느낌이 달라졌다. 평소엔 수줍고 섬세해 보이기만 하던 남자가 불현듯 강하고 거친 모습을 보이면 여자는 두근거린다. 아, 이 남자도 남자였구나, 홍조를 띠며 설렌다. 그러나 때로 그것은 몇 개의 디테일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 이 남자도 대한민국 남자였구나, 가 바로 그것. 그 안엔 ‘어쩔 수 없이 결국’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대한민국 남자’의 상징적 이미지는 ‘남자 중의 남자’, ‘남자들이 좋아하는 남자’, ‘사나이’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신념, 명예, 책임, 역경을 이겨내는 힘과도 같은, 성별을 초월한 가치를 말하고 싶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힘들게 노력해서 처자식 먹여 살린다’, ‘남자가 짊어져야 하는 인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처럼 나라를 지키는 군인과 가정을 지키는 가장의 이미지와 더 긴밀히 맞닿아 있다. 이른바 ‘강한 보호자’라는 건데, 문제는 ‘주변인’들 입장에선 과거 경험상, 그들이 봉사한 만큼 통제에 대한 자동 권한도 묵인해줘야 하고 그들의 드높은 자존심도 지켜줘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낀다. 게다가 대한민국 남자는 자존심 빼면 시체인데 그 자존심은 남자들간의 싸움에서 이기는 걸로 지켜지기에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자는 애초에 열외였다. 한 명의 생물학적 여자를 ‘디스’하려다 되레 다른 숱한 여자를 심리적으로 소외시키는 건가?
‘남자의 자존심’이 그간 여자들에게 갑갑했던 이유는, 종종 그것을, 자신이 틀려도 신념이라며 절대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을 바꾸거나 굽히는 것은 폼이 안 난다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문재인 후보 쪽이 적극적으로 국민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대한민국 남자’라는 피아이(PI)를 철회할 수 있었음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도 그런 것이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진정한 남자의 모습”을 찾기 위해 ‘대한민국 남자’라는 피아이가 붙여졌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던 과거의 남자 중 그렇게 매혹될 만한 남성 롤모델은,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생각이 안 나기 때문이다.
분명 대한민국 남자는 진보적으로 더욱 진화될 여지가 있으니 차라리 ‘새로운 대한민국 남자’상을 몸소 제시하고 구현해주면 좋으련만.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남자를 잊고 있었다면 그것은 잊을 만하니까 잊고 있었던 것뿐이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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