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08 17:04
수정 : 2012.08.11 14:35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세상의 여자를 둘로 나누면 남자한테 선물을 잘 받는 여자와 못 받는 여자로 나뉠 것이다. 잘 안 받아봐서 어색해하는 건지, 자꾸 어색해하며 사양하니까 못 받아내는 건지,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름 길었다면 길었던 연애인생 동안 내가 남자로부터 받은 물질적 선물이라고는 한라산 정상등반 기념메달, 석사 졸업논문, 노랑 장미 한 다발이라는 사실이다. 남자한테서 옷이나 백, 장신구 따위를 자주 선물받는 여자들이 ‘아무 말 안 했는데 그냥 사주네’ 식으로 눈 굴리며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내가 여자로서 뭔가 중대한 현실을 놓치고 있다고 미처 생각하질 못할 만큼 둔감했다.
이 현상을 두고 나는 그저 ‘나한테만’ 안 사주는 게 아닌, 세상 남자들도 단순히 여자에게 선물을 잘 주는 남자와 잘 안 주는 남자로 나뉜다고만 생각했다. 그중 하필이면 잘 안 주는 남자들만 골라 좋아했던 것일 뿐. 그런 그들이 마음먹고 준 일련의 선물들을 이제 와 돌이켜보면 참 다들 나르시시스트였구나 싶어 피식, 엄마의 미소조차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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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의 날에 ‘파란 장미’ 선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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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보다 자신의 성취를 뽐내거나 취향대로 주는 남자들이었다. “너를 생각하며 등반해서 따낸” 한라산 정상등반 기념메달, “네가 곁에 없었더라면 나오기 힘들었을” 석사 졸업논문, 그리고 “흔해 빠진 빨간 장미나 핑크 장미 같은 여자는 싫지”라며 준 완전 튀는 노랑 장미 등, 꿈보다 해몽이 근사했다. 주변에선 ‘그게 무슨 선물이냐?’ ‘석사논문은 라면받침대로나 쓰시지’라며 조롱했건만 그들은 뿌듯해했고 나도 여태 메달과 논문을 보관하고, 노랑 장미도 세균덩어리가 되기 전까지는 한동안 드라이플라워로 간직한 걸 보면, 꽤나 좋아라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 맥락 없는 선물들은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좋아하는 남자라면 그가 태우다 남긴 담배꽁초라도 모을 기세!
유치하고 촌스럽고 비실용적이면 어떠랴. 브랜드 따윈 몰라도 되고, ‘간지’ 아이템을 선물받지 않아도 괜찮다. 나 역시 별로 잘한 것 없는 지극히 나르시시스트였으니. 시작은 열일곱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첫눈 내리던 그날,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데려다 준 남자친구와 작별 후 오 분 뒤, 아파트 3층 내 방 창문을 열어 그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그가 몸을 돌리자 내가 직접 털실로 짠 삼미터 길이의 치렁치렁한 검정 목도리를 라푼첼처럼 창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목도리는 펄럭펄럭 눈송이 사이를 비집고 그의 품으로 날아갔고 안경에 김 서려 더욱 어리바리해 보였던 그는 그걸 잡아 감격에 찬 표정으로 손에 쥐며 바라보더니 이내 목에 둘둘 두른 후, 목청껏 사랑한다 수차례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러니 내가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고도 시큰둥했지.
김동률 시디(CD)보단 직접 짠 목도리가 낫지 않나? 여자의 사념이 가득 담긴 핸드메이드 선물을 남자들이 질색한다는 사실도 한참 후에 알았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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