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9.19 18:01
수정 : 2012.09.19 18:14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좋아하는 남자가 내게 선을 긋는 걸 지켜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차라리 “너의 옷차림이 맘에 안 들어”라든가 “넌 어쩜 그리 제멋대로냐”고 한다면 개선의 여지라도 있지, ‘널 그만큼 좋아하는 건 아냐’라는 제스처는 여자를 철저히 무력화시킨다.
친구나 부모에게 소개하지 않거나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한 것은 선 긋기의 올타임 클래식이다. ‘좋아하지만 사랑은 아니야’ ‘성적 매력을 느끼지만 사랑은 아니고’라며 굳이 위로하듯 선 긋는 남자가 있었고, 결혼을 거론해도 자기를 위해 변해줄 것을 요구하며 내가 먼저 선의 존재를 느끼게 한 남자도 있었다. 가장 알기 쉬운 선은 유부남이 처녀에게 긋는 선이었다. 정황상 난 몸을 사렸지만 그는 나 좋다고 난리난리였다. 구차한 부연인 건 나도 안다. 어쨌든. 그런데 어느 날 그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는 카운터에서 혼자 식사하고 있었고 그는 저 아래 부스 테이블에서 가족과 함께였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지인인 척 인사하러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목에 담 결린 사람처럼 꼿꼿이 고개를 저쪽으로 돌린 채 미동도 안 했다. 나는 전기 철조망에 가까이 다가가려다 움찔해서 왈왈 뒷걸음질치는 잡종 강아지처럼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그는 더없이 감상에 젖은 미안한 표정으로 아침 일찍 내 회사 앞으로 찾아왔지만 역시 상도덕상 누군가는 선을 그어야만 했다. 그래도 역시 내가 여태껏 들어본 것 중 가장 창의적이고 끔찍한 선 긋기의 그랑프리는 “지금 너와의 결혼은 여의치 않으니 혹시 나중에 네가 결혼한 후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 그때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말이었다. 나 지금 결혼했지만 아직 이혼은 안 했으니 가능성 열어두고 있는 거다?
선 긋기가 잔인했던 것은 ‘널 그만큼은 좋아하지 않아’가 완곡하게 차이고 있다는 뜻인지, 앞으로 하기 나름이라는 것인지, 여자를 더없이 헷갈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헷갈리든 말든, 어차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은 나였기에 완전히 끝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혼자 더 좋아하는 시간이란 참으로 많이도 ‘기다리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나도 남자들에게 선을 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애매하고 자비로운 선 긋기 공법에 진저리 쳤던 나는 정정당당하게 악역을 맡기로 결심했다. 한데 천성이 비굴하다 보니, 상대를 분명 덜 좋아함에도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잘, 해명하고 납득시키려고 전전긍긍 애쓰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분명 사랑의 강자인데 더 끙끙댔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간혹 상대 남자는 “그래, 알았어, 이 이상 부담 주지 않을게” 하며 정말 미안하다는 듯 안쓰럽게, 그리고 사랑스럽다는 듯 슬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 때가 있었는데, 아 또 막상 그렇게 나오시면 난 왠지 마음이 두근거려 그의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게 되고. 바보냐.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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