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10 18:03
수정 : 2012.10.10 18:03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스물한살에 만난 그는 도쿄대학 이공계열 박사과정을 다니던, 두꺼운 안경을 낀 착하고 수줍고 왜소한 남자였다. 그가 나를 조심조심 챙겼던 이유는 물론 나를 여자로 좋아했기 때문인데 그 마음에 보답 안 할 걸 알면서도 때론 그 마음을 이용했다. 그도 알고는 있었지만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 관대한 틈을 타, 나는 전공도 잘못 택했고(그러는 너는 어차피 빼도 박도 못하고 그 전공 해야 돼서 좋겠다), 학부시절 꿈이 알고 보니 내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고(그러는 너는 공부해서 교수 할 게 확실해서 좋겠다), 수업보다 주재원 자식들 과외 알바에 치중해야 하는 경제사정(그러는 너는 서울에서 생활비 보내줘서 좋겠다)에 대해 그에게 짜증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이었지만 그걸로 얽힐지 몰라 솔직하지 못했다. 최악의 여자였다.
응응 들어만 주던 그가 하루는 눈을 껌뻑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마흔 전에 실명할 수도 있대. 이 공부 다 해서 뭐하지…” 뜻밖의 고백에 놀랐지만 타인의 비장미가 보기 싫어 어서 다른 화제, 나에 대한 이야기로 돌렸다. 그 점처럼 작은 두 눈이 ‘너 혼자 어리광 부리지 마라’ 벌게져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웠다.
힘든 때일수록 내 타입이 아닌 남자한테 흔들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늦가을의 그 밤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몸이 너무 아파 이대로 혼자 잠들다간 다시는 못 깨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배, 그래서 말인데…지금 와줄 수 있어?” 시계는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싱글침대와 책상 빼고는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정도로 비좁았던 원룸에 그가 도착했다. 여자 방에 처음 와본 듯 그는 어색해했고 내가 어색함을 풀어주고자 우스개로 놀리니 경직된 표정으로 그가 걱정 말고 어서 자라고 일렀다. 내가 눕자 그는 침대 옆 바닥에 양반다리로 나를 등지고 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았지만 자는 것 같진 않았다. 실명하면 저런 모습일까, 비스듬히 그를 보며 떠올렸다.
이토록 적막에서 가까이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 일 안 일어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공기의 농도에 내가 못 견뎌 팔 뻗으면 바로 닿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볼까도 생각했다. 이게 차라리 이 밤에 날 지켜준 것에 대한 공정한 보답일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눈이 떠졌고 그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일어났니? 좀 괜찮아?” 똑바로 보지도 않고 그가 물어보더니 웅크린 몸을 일으켜서 이만 가겠노라며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분명 그의 팔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는 또 한번 있었지만 나는 끝내 그러지 않았다. 그때 내 마음을 다스린 뒤의 이상하게도 비릿한 뒷맛이 ‘스스로에 대한 실망’의 맛이었음은 한참 뒤에 알 수 있었다. 당시 내가 통제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나의 모든 것에 눈을 감아 주었던 것뿐이다. 지난 글들은 안 그랬는데 이번 글만큼은 그 남자가 읽어주길 바라고 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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