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1.07 17:12
수정 : 2012.11.07 17:12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돌이켜 보면, 삶의 크고 작은 성취들은 모두 좋아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다. 무엇 하나 잔소리 안 하는 부모와 자랐으니 대신 ‘연애’가 ‘공부’나 ‘일’의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그냥 에너지가 펄펄 끓었다.
열여덟, 대학 2학년 때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른여덟살의 한 외국대학 선생을 만났다. 혼란스러운 대학 분위기에서 우왕좌왕하는 또래 남자 대학생들을 보다, 모든 생각들이 정돈된 남자를 알게 되는 것은 안도되는 일이었다. 며칠을 우리는 만나고 또 만났다. 그는 두 배의 시간을 살아낸 남자였지만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에 대해 물었고 내가 주섬주섬 대답을 하면 그 대답 속에서 가장 신중한 언어로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내가 무척 소중히 다뤄지고 있다는 호사스러운 첫 경험이었다. 귀국 후에도 서로에게 긴 편지를 쓰고 또 썼다.
일년 후, 그가 자신이 적을 둔 대학의 대학원 입학원서를 내게 보내왔을 때, 나는 잔한숨을 몰아쉬었다. 안 그러면 가슴이 빨갛게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그 힘으로, 단지 그가 보고 싶어, 높은 경쟁률을 뚫고 어떤 단체의 장학생으로 뽑혀 여름방학 내내 일본에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다. 그렇게 이제 갓 마흔이 된 그와 이년 만에 한 러시아 식당에서 재회했고 그는 테이블 너머로 쉴 새 없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착한 모범생처럼 그간 얼마나 치밀하게 대학원 준비를 해왔는지 그에게 보고했고 내 말이 끝나자 흐뭇한 미소의 그가 잠시 표정을 굳히면서 자기는 곧 결혼하게 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시야가 먹색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알았다. 난 사실 공부에 아무 관심 없고 오로지 그가 유학의 이유였음을. 오기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겠지만 도중에 학업을 그만두리라는 것을. 훗날 그 모든 것은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정확히 그 연애 때부터 나는 말끔히 체념하는 태도를 배웠다. 다시 말해 이별하면서 상대를 저주하거나 원망하거나 배신했다고 공격하지 않았다. 며칠 극심하게 괴로워하고 슬퍼하긴 해도 이내 그리움으로 그 상대를 마음속에 남겼다. 그러고선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하고, 더 열심히 다른 연애를 시작했다. 나를 버리고 간 그 남자에게 보란 듯이, 가 아니라 그냥 자체적으로 힘이 샘솟았다. 어떤 여자들은 사랑의 상처에 몇 년씩 헤매거나 다시는 사랑을 못할 것 같다며 비통해하는데 난 왜 이 모양일까, 난 어쩌면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내가 좋다. 왜냐하면 울고 화내기엔 인생은 너무 짧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기 때문이다. 관계에 대한 낙관성은 그때 그 남자가 내게 몸소, 자신이 나를 놓고 가버림으로써, 역으로 남겨놓고 간 선물이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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