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1.21 17:00
수정 : 2012.11.22 14:08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나이지리아에서 온 ‘타이워 아데데지’라는 남자아이는 피부가 까만 아이였다. 열 살 때 포르투갈 미국인학교에서의 첫날, 그와 악수하면서 검은 손등과는 다른 울긋불긋 분홍색 손바닥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난다. 세계 각국의 아이들이 한 반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키가 작고 까맣고 학업수준을 못 따라가던 그는 눈에 띄었다. 열 살 나이란 명백한 선긋기를 할 만큼 잔인해지지도 못했지만 차이에 따른 구분지음을 의식하기 시작할 나이였다. 시무룩해진 그가 퉁퉁 두꺼운 입술을 앞으로 더 삐죽 내미는 얼굴을 볼 때마다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타이워는 어느덧 다른 아이들이 슬슬 피하는 아이가 되었다.
굳이 유럽 촌구석 근무를 선택해서 올 만큼 낭만적이고 사람 좋던 곱슬머리 미국남자 존 선생님에게 유일한 고민거리는 타이워였다. 선생님이 노골적으로 야단치면 인종차별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아이들이 분위기에 동조하게 될까봐 우려돼서 애써 참을수록 타이워는 일부러 더 고집부리거나 신경 거슬리는 짓을 일삼으며 존재감을 피력했다. 자신을 약자로 치부해서 대놓고 야단쳐주질 않은 것에 상처를 받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타이워의 정신적 폭주를 막은 것은 천연 금발 미국 여자아이 에이미였다. 다른 유색인종 아이들이 타이워에 대해 서먹해할 때, 에이미만은 마치 “뭐가 문제야?”라는 듯 타이워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인종차별의 위험성을 애초에 감지할 일이 없으니 당연했다. 어쩌면 ‘깬’ 부모님들은 주변의 유색인종 친구들이 있으면 더 잘해주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타이워는 어느덧 고마움과 안도감을 넘어 에이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에이미가 내 손을 잡고 1인용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걸터앉아 소변을 보면서, “경(당시 내 영어호칭), 타이워 말이야, 네가 보기에도 나를 좀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니?” 하며 사뭇 걱정된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랑삼아 떠벌리는 식이 아니라 진심 좀 걱정되고 ‘경, 너에게라면 이런 얘기를 솔직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넌 다른 애들보다 입도 무겁고 똑똑하고 어른스럽잖아’라는 듯. 정작 나는 반에서 가장 인기있던 순도 백 프로의 백인 금발 여자아이가 가장 은밀한 장소로 나를 끌고 들어가 그녀의 속내와 속몸을 보여준 것에 혼자 내심 흥분했던 전혀 어른스럽지 않은 아이였다. “됐어. 네가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지, 뭐.” 쿨한 태도로 나는 그녀에게 조언했고 머리가 썩 좋지는 않았던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 머리에 파란 눈으로 태어난 것이 네 탓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보답할 수 없는 남자애한테 그냥 싫다고 말하는 것이 그냥 단지 싫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혐의까지 넌 짊어져야겠지. 열 살은 의도하지 않게 상대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자신도 상처받을 수 있음을 어렴풋이 알아가는 나이이기도 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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