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05 17:03
수정 : 2012.12.08 13:35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지난 연애들에서 나는 주로 차였던 여자였다. 나는 가끔 왜 그토록 차이기만 했을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 것뿐이다.
여러 생각 끝에, 내가 그를 먼저 차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가 차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먼저 차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악역은 필연적으로 그의 차지였다. 내게는 상대를 먼저 찰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사람과는 아예 시작도 안 했고 한번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와는 최소한 내 쪽에서만이라도 불씨가 꺼지지 않게 연료를 바지런히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의 열정이 충분했다. 게다가 나에겐 ‘내가’ 그를 좋아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고 그는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데에 도움을 준 고마운 그 사람이니, 상대와 자존심을 건, 누가 누구에게 먼저 상처를 주나 같은 의자놀이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그’ 말을 꺼낼 때가 다가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아챌 만큼 예민했다. 어떻게? 자주 차이다 보면 그런 것쯤 느낌으로 안다. 게다가 사람은 대개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의 그림자를 계속 따라가게 되는데 이렇게 엇비슷한 사람만 좋아하게 되니 계속 비슷한 이유로 차이고 고로 그 징후들은 절로 체감학습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도 상황은 또 데자뷔 반복. 이별이 가까워짐을 느끼면 좋았던 시절들이 생각나면서 우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를 시무룩이 생각한다.
왜 그런 일이 매번 일어나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때의 따뜻하고 촉촉한 눈빛이 한순간에 서늘하게 바뀔 수 있음을, 같은 입으로 전혀 다른 목소리 톤이 나올 수 있음을 알았다. 그가 변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었던 시선과 언어들은 예의상 약간의 변형은 주되, 고스란히 다른 여자한테 곧 안겨질 테니까.
때로는 내가 이렇게 이별, 아니 돌연한 차임에 담담해진 이유가 과거에 암 선고라는 쇼크를 수차례 겪은 것과 관련이 있나 싶다. 순간적으로 온몸과 정신을 마비시킬 만큼의 압도적인 소식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면 그 후 안 좋은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말초신경을 자동적으로 무디게 만들 수 있는 능력 같은 게 생기는 것 같다. 이것은 불가항을 받아들이는 저주받은 재능이다. 연속으로 몇차례 겪다 보면 더이상 ‘왜 나지?’ ‘왜 나여야만 하는 거야?’ 같은 질문도 잘 안 하게 된다. 애써 의식을 무디게 꾹 끌어안고 있다 보면 고통은 어느새 내 앞을 지나쳐감을 알기에 상대가 아닌, 시간을 상대로 묵묵히 싸우는 것이다.
왜 차였는지를 알려고도 안 하고, 알아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학습이 될 턱도 없다. 삶에 수반되는 고통들은 힘겹지만 배움을 얻어가니, 대개는 힘들어도 ‘아픈 만큼 성숙해지면서’ 뭔가를 배우는 편이 낫다지만 나는 솔직히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교훈이니 성장이니 배움이니 하는 것은 죄다 말장난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질 뿐이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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