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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2.21 09:36 수정 : 2012.12.21 09:36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요새처럼 빙판 언 추운 겨울날에는 대학가의 여관들이 생각난다. 그때 아이들은 정말 이래저래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새벽에 귀가가 어렵게 된 애들은 떼 지어 학교 근처 여관에서 함께 투숙을 하곤 했다. 여학생이 끝까지 남아 있다면 남학생들은 최소 세 명 이상 같이 한방에 들어가면 안전할 거라고 판단했다. 잠은커녕 밤새 더 술을 마시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그러나 아무리 강철체력 이십대라 하더라도 급기야는 하나둘 뻗었고, 실은 방에 들어간 남녀 비율보다는 누가 그 여학생의 옆자리에 눕게 되느냐가 문제였다. 물론 애초에 호감이 가는 남학생이 그 안에 껴 있었기에 여학생도 겁 없이 들어갔을 것이고 둘은 이내 자석처럼 이끌리듯 나란히 누웠을 것이다.

“…설마 아무도 눈치채지 않았겠지?” 나는 졸업 후 적지 않은 수의 첫 관계가 그런 한겨울날의 우정 어린 합숙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여자아이들은 부끄럽지만 애틋하게 도시전설의 여주인공인 양, 그러나 나이 탓에 아줌마의 수다스러움을 못 이기고 그 은밀한 기억을 폭로하고야 말았는데 문제는, 친구야, 나 이미 그 사실 알고 있었단다. 남자들이 얼마나 입이 싼지 모르는구나. 하긴 모르는 게 구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술에 취하는 것을 안 좋아하던 재미없는 여자아이였던 나는 그런 무용담 없이 학교를 졸업했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성문제에 대해 긴장하고 고민하고 방어하거나 방치했던 사이, 나는 그냥 연애를 하면서 모든 것이 때 되면 자연스러운 형태로 몸을 열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두렵지도 아깝지도 거추장스럽지도 않고 대신 당시의 직감을 중시하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남자친구들의 인내심이 참 대단했지 싶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 느낌 알아?” “…알 것 같아. 알았어.”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그랬던 ‘파카’의 그 아이들은 이윽고 ‘롱코트’가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 한겨울에 다시 나타났다. 마치 이제 준비됐잖아, 라듯. 졸업 후 우연을 가장해서 다시 만날 때엔 자연스러움이나 우발성은 없었다. 확연한 어른이 된 우리에겐 많은 것이 예측 가능했고 몸을 공유하지 않았던 관계는 오로지 서로의 몸만이 의식이 되었다.

“추운데 어디 들어갈까?” 묵직한 공기가 두 사람을 에워쌌다. 그 축축함에 나는 불쑥 정신이 든다. 아뿔싸, 이 남자는 받을 것을 받으러 온 거야. 그의 상기된 표정에 마치 나는 빚쟁이가 된 것만 같았다. 눈물겹게도 꼭 끝까지 안 갔던 남자들만 이렇게 망령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대개의 빚 받으러 온 사람이 그러듯, 그들은 세게 나오기도 하고 서두르는 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관계에서 빠졌던 유일한 퍼즐을 마침내 끼워넣고 나면, 그는 고요한 표정과 초연한 뒷모습을 내게 보이며 떠날 것이고, 두 번 다시 서로 볼 일이 없을 거라는 것쯤도 미리 알 만큼 우리는 완연한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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