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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23 18:04 수정 : 2013.01.24 10:35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예전에 라디오 상담을 했던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의외로 정말 많이 들어왔던 질문이 ‘오랜만에 연락해온 이 남자를 어떻게 할까요?’임을 알고 혼자 피식 웃었다. 세상의 많은 남자들이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다시 연락하고 그녀들은 흔들렸던 것. 어이없고 화나기도 했다가 우쭐하면서 기쁘기도 했겠지. 남자가 여자를 찬 것임에도 대체 왜 이제 와서 연락해오는 것일까? 가물가물 이제쯤 잊을까 했던 가슴 아팠던 이별의 기억들을 서랍에서 다시 꺼내봐야 하잖아.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는 절대운명처럼 설레고 들뜨지만 끝날 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생수업으로 추락했다. 가장 흔한 이별법은 연락두절을 통한 자연소멸이었다. 연락이 겨우 돼도 묵묵부답 말을 안 하니 나와 끝내고 싶은 거냐 추궁하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하는 수 없지”라며 칼을 쥐여줬다. 스킨십 회피와 돈 쓰는 것에 티나게 인색해지면 구질구질하고 비참해져 끝을 내야 했다. ‘널 위해 놔주는 거야’라는 느끼함도 ‘여자가 질척거리는 거 딱 질색’이라는 모멸감도 존재했다. 그냥 정직하게 자기 의사를 짧고 담담하게 말해주고 끝내면 좋을 텐데, 여자가 상처입고 성내는 것을 아주 잠시만이라도 시선 피하고 귀 닫지 않고 정면으로 들어주면 좋을 텐데,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까.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악의 이별법은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놓고선 다시 나타나거나 불쑥 연락하는 것이었다.

“잘 지내나 궁금해서.”

막상 내가 그 덜미를 잡고 매달리면 그것도 곤란할 거면서 아직도 자기 생각 좀 하는지 나르시시스트들은 궁금해했다. 완전히 잊혀지는 것은 삶이 쓸쓸하니 마음이 조금 허전한 밤이면 ‘그녀를 상처입힌 나라는 나쁜 놈’이라는 감미로움에 빠져 추억의 번호를 눌러보지만 그것은 그의 일시적 변덕. ‘역시 당신이 좋아’ 같은 태도를 보이면 남자는 바로 다시 등을 보였다. 물론 그런 남자를 만나주는 여자가 바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십여년 전 이 춥고 시린 계절에, 하필 생일 일주일 전쯤 나는 파경을 맞이했더랬다. 친구들이 잊으라며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줬다. 당시 내가 자취하던 동네는 술집 다니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던 원룸촌이었는데 내가 퇴근하면 그녀들은 출근했고, 내가 출근하면 그녀들은 퇴근했다. 생일밤의 새벽 골목길은 그래서 덩그러니 내 차지. 터벅터벅 집 앞에 다다르자 그가 서 있었다. 남자친구라 부를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대체 얼마쯤 저기 서 있었을까. 야구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그의 빨간 귓불을 만져보니 한참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오늘…생일이었지? 생일 축하해.”

이 남자가 불과 얼마 전에 나한테 그토록 심한 말을 했던 남자였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나는 뭐라도 대꾸하고 싶었지만 멍청이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모락모락 하얀 김만 뿜어져 나왔다. 동네 술집언니들이 봤다면 한심해했겠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끌어당겨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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