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6 17:59
수정 : 2013.02.09 10:49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일로 알게 된 그 남자는 어느 날 내가 살던 오피스텔 건물로 이사를 왔다. 우연이었다. 나는 사생활 보장이 안 될까봐, 툭하면 술 먹자고 불러낼까봐 걱정 반 짜증 반이었다. 그래도 의리상 이사 오는 날 짐 나르는 것을 도왔는데 그의 살림살이가 조금 기묘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조심스레 알아보니, 독신인 줄 알았던 그에게는 한때 아내가 있었는데 2년 전 힘든 출산을 거치면서 아이와 함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충분히 나이 많던 그에게 아무도 노총각 운운하는 농을 건네지 않았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처음엔 그런 배경 때문에 심리적 부담을 느꼈는데, 같은 데에 살다 보니 차도 얻어타게 되고 오다가다 밥도 먹고 때로는 즐거이 오피스텔 앞 포장마차로 불려다니다가 내가 그만 먼저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는 내 변화에 당혹스러워했지만 그렇다고 호의를 내치지도 않았다. 받아들이긴 힘들었겠지만 외로웠을 터이고 슬픔에 젖어 있는 것 자체가 슬슬 버거워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반응했더라면 아마 내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을 것이고 어쩌면 사별한 아내에 대해 의리를 지키는 그에게 더 달아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아직 아내의 3주기가 안 되었던 시점에 그 의리는 너무 취약하게 허물어져 버렸고 그는 처음엔 심리적 저항으로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이내 체념한 듯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더불어 깊은 안도감을 느낀 나는 그때부터 결혼이라는 단어를 그 앞에서 꺼냈다. 그는 이번에도 적극적인 긍정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치지도 않았다. 나는 어서 그의 3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어설프게나마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짐 포장을 도우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지런히 짐을 옮겨담고 있는데 불현듯 내가 정리하던 짐 속에서 사별한 아내의 커다란 영정사진이 뛰쳐나왔다.
“아…!”
처음 보는 그녀의 웃는 정면사진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나는 본의 아니게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그는 황급히 이쪽으로 건너왔고 내 손에 들린 그 액자사진을 보더니 대뜸 빼앗아 굳은 표정으로 다른 짐 사이에 얼른 쑤셔넣어 버렸다.
사진의 충격으로 뭔가에 씐 듯 나는 미뤘던 일들을 하나둘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쉬쉬했던 사내연애를, 회사에서 가장 입 가벼운 여자에게 일부러 흘렸다. 부모님께 그에 대해 빠짐없이 이실직고했다. 엄마의 눈물과 아빠의 무거운 침묵을 견뎌내며 겨우 승낙을 받아냈던 날, 긴장이 풀려서 나도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고 그저 빨리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해했다. 그 모습이 불안했다. 불안한 예감은 적중해서, 며칠 후 그는 역시 결혼만큼은 못하겠노라고 했다. 명료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싸울 순 없지 않은가.
임경선 칼럼니스트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