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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06 18:18 수정 : 2013.03.06 18:18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여자의 평균수명이 더 길다. 하지만 내 주변에서만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아픈 아내를 돌보는 남편들은 곳곳에 은밀히 존재했다.

엄마의 마지막 몇 년을 아빠가 곁에서 간호했다. “너네 아빠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걸리적거려. 걸핏하면 몰래 술만 먹으려고 하고…하여간 남자들은 하등의 쓸모가 없어.” 회사 다닌다는 핑계로 겨우 주말에나 찾아뵈면 거동이 불편한 엄마는 딸을 안방으로 불러 아빠에 대한 불만을 힘겹게 토로했다. 속상함과 죄책감에 얼굴이 벌게져서 거실로 나와보면 아빠는 초점이 없는 눈빛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엄마 대신 뭐라 화를 내고 싶었지만 부쩍 늙고 지친 아빠 모습에 대신 그의 끼니가 걱정됐다.

나 아파서 누워 있을 무렵엔 가장 큰 걱정거리가 남편을 실망시키는 일이었다. 내 건강보다 내 몸아픔으로 인해 남편이 힘들어할까봐 더 신경쓰였다. “또 아파?”라는 답답해하는 표정을 보는 게 두려웠고, 그가 나를 심정적으로 버리거나 지겨워하거나 지긋지긋해할까봐 최대한 아파 보이지 않으려 했다. 퇴근 전쯤 혼자 내과에 기어가서 영양제 링거를 맞거나 값비싼 피로회복제를 투여했고 장기 해외출장을 간다고 했을 때도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진실은 무엇 하나 괜찮지 않았다. 엄마 말대로 남자들은 성가시기만 하고 참 도움 안 되는 존재인 것 같았다. 여자가 마음껏 아플 수 있고 간호받기는커녕,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남자를 걱정하게 만든다. 때론 누가 누구를 돌보는지도 헷갈렸다.

그럼에도 탓하지 못했다. 자기 여자를 간호하는 남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취약하고 무신경한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도 너무 힘들어”라는 말을 뻔뻔하게 하지도 못하며 그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요만큼의 ‘선의’를 필사적으로 서툴게 실천할 뿐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여자의 마음은 속이 타고 답답하지만, 돌이켜보면 건강했을 때조차도 ‘잘해준다는 것’의 개념이 서로 달라서 늘 문제가 아니었던가. 내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었지만 상대가 내가 좋아할 줄 알고 하는 것을 두고 뭐라고 거부하지도 못했고, 내가 이런 식으로 잘해주고 싶다고 생각해도 상대가 그것을 정말 좋아할지가 고민되어 주저했다. 엄마는 끝내 아빠에게 직접 속내의 원망 한번 내비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나는 그것이 그녀의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원망 어린 눈빛의 앙상하고 험상궂은 엄마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이젠 다행히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으로 내 잔상에 남아 있다. 반면 지금은 아빠가 ‘걸핏하면 몰래 술만 먹다가’ 간호하는 여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유달리 춥고 길었던 지난겨울, 컨디션이 나빠진 아빠는 함께 외식하러 나갔다가 식당 화장실에서 큰 낭패를 겪기도 했다. 한편 내 경우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것을 남자에게 대놓고 요구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아니기에 대신 필사적으로 운동을 열심히 했다. 다음번엔 내가 친히 간호해줄 차례이기 때문이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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