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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09 16:02 수정 : 2012.02.09 16:02

사진 이기원 제공.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샐러리맨 비자금 800만원으로 국산 경차 대신 선택한 중고 ‘골프’

뭔가를 구입할 때 가장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용기다. 나 같은 가난뱅이들에게 A를 산다는 건 B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떡볶이를 먹었으면 순대에는 눈길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아, 기회비용의 더러움.

오랜 연인이었던 택시에 대한 애정을 잠깐 접고 차를 사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그 금액으로 내가 살 수 있는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오래전부터 사고 싶었던 트렌치코트, 맥북 프로, 아버지 환갑잔치에 드릴 효도 상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에 대한 욕망은 칡뿌리처럼 질기기만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한번 결심을 하자 어떻게든 사야겠다는 생각만이 강렬했다.(매일 30분씩 운동하자는 결심은 하루에도 골백번씩 바뀌는 주제에.)

가용금액은 약 1000만원. 리스나 할부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비 개념이 약한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몇 가지 중에는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 할부 절대금지가 있었다. 이마저도 못한다면 나는 진작에 신용불량자가 됐을 것이다.

준비된 금액이 적다 보니 구입 목록을 작성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현실을 생각하면 국산 경차로 가는 게 맞았다. 아니, 경차에 대한 수많은 혜택과 연비, 빈약한 통장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된장끼’가 발동한 마음은 멀쩡한 국산 경차 대신 자꾸 수입 중고차로 가고 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명분이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장치. 나는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을 떠올렸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매일 한 발짝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걸 하세요.’ 잡스 형아가 이런 데 쓰라고 한 말이 아닌 걸 알면서도, 결국 그 논리로 자기합리화를 하고 말았다. ‘백년도 못 살 주제에 이 정도는 맘 끌리는 대로 해도 되잖아?’

수입차로 마음을 정하자 결정은 쉬웠다. 오래전부터 4세대 골프를 맘에 둬왔기 때문이다. 골프라는 모델이 가지는 히스토리가 좋았고, 멋 부리지 않은 듯 멋 부린 디자인도 좋았다. 그래도 중고차라 걱정이 된 나머지 ‘대리점 보증차량’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것들만 살피다 눈에 딱 맞는 걸 찾았다. 주행거리 10만㎞를 갓 넘은 2002년형 모델. 가격은 800만원대. 엔진 소리도 양호했고, 공식 딜러에게 꼼꼼히 정비를 받은 흔적을 문서로 남겨놓은 것도 좋았다. 전 주인이 그렇게 허튼사람은 아닌 것 같아 맘이 놓였다. 10년 된 차라 세금이나 보험료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물론 이제 슬슬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어쨌든 10년 된 차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쳐서 쓰면 돼’라는 대책 없는 낙관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뭘까. 여기서 다시 한번 소비의 가장 중요한 덕목 하나를 떠올린다. ‘누가 뭐라건 내가 좋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이런! 불행히도 이 글을 쓰는 지금, 시동이 자꾸 꺼지는 증상으로 차는 정비소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것 말고도 여기저기 수리할 곳이 꽤 있어서 예상 수리비는 대략 100만원 정도. 알 수 없는 불안이 몰려왔지만, 구입을 만류하던 친구와 선배들에게 발설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쪽팔리면 지는 거니까.

이기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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