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22 19:08
수정 : 2012.02.22 19:08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내 인생 처음 내지른 20만원짜리 방향제
취향의 변화는 성인이 된 뒤에도 생긴다. 어릴 때는 보기만 해도 질겁하던 생간이 젤리처럼 맛있게 느껴지고, 단맛을 싫어했지만 요즘의 나는 초콜릿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허황한 일만 벌려 ‘왜 저렇게 사나’ 싶었던 형의 라이프스타일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나이가 드는 것이 다행스러운 이유는 삶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지혜를 조금씩 갖게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꼭 그런 건 아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 만큼 참을 수 없는 것들도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상할 정도로 냄새에 민감해졌다. 내가 온몸으로 꽃향기를 뿜어내는 사람이라 이런 소릴 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하루에 담배 한 갑 이상을 해치워버리는 헤비 스모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건 있으니까.
냄새에 대한 강박은 살고 있는 집으로까지 번졌다. 사실 집은 온갖 냄새의 집합소다. 욕실을 청소할 때 썼던 락스 향, 한 달 전에 산 가죽 가방, 이틀 전에 끓인 된장찌개, 어제 드라이클리닝한 코트, 몸의 체취. 이 모든 것들이 섞여 있는 ‘집 냄새’가 어쩐지 나를 어지럽게 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고 싶었다. 인생 처음으로, 방향제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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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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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샀던 건 편의점에서 흔히 파는 젤 타입의 방향제였다. 값은 적당했지만, 향이 너무 강하고 인공적이라 오히려 머리가 더 어질했다. 좀더 은은한, 공간을 감싸주듯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향이 필요했다. 그러다 우연히 백화점에서 독특한 물건을 발견했다. 나무로 만든 스틱이 촘촘히 꽂혀 있는 병에는 ‘리빙퍼퓸’(Living Perfume)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방향제였다. 등나무로 만든 스틱을 꽂아놓으면 방향제의 원액이 나무에 스며들어 스틱의 상단 끝까지 가서 퍼지는 식이었는데, 무엇보다 향이 은은하고 좋았다. 모양이 예뻐 인테리어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마음에 쏙 드는 제품을 만났지만 좋은 건, (대부분) 비싸다. 1000㎖ 용량이 20만원을 훌쩍 넘었다. 일개 방향제에 과연 이 정도 금액까지 지불해야 하는 걸까? 하루 종일 집에서 냄새만 맡고 살 건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머릿속으로 20만원의 기회비용을 생각해봤다. 스크래치가 너무 심하게 난 나머지 구두수선공도 버리라고 충고했던 하나뿐인 구두, 오랫동안 기다렸던 엑스박스 키넥트용 스타워즈, 산산이 부서져버린 디에스엘아르(DSLR) 렌즈…. 없어도 그만일 방향제 따위 포기하면, 적어도 이 중 하나는 살 수 있었다.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 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점원이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한번 사면 8달 정도는 거뜬히 쓸 수 있어요.” 그래, 8개월을 즐겁게 살 수 있다는데, 20만원이 그렇게 큰 금액인가?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은 간단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구입한 방향제, 아니 리빙퍼퓸은 지금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고이 모셔뒀다. 처음에는 방 안 가득 좋은 향이 나 어서 빨리 침대에 눕고 싶더니, 익숙해진 지금은 처음만큼 산뜻하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정서적 이득이 있었다. 스트레스가 많았던 날에는 자기 전에 코를 가까이 대고 크게 공기를 들이마신다. 코끝으로 부드러운 향이 흘러들어오면 오늘 하루 나를 살인자로 만들 뻔했던 연놈들을 모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정도면 값어치는 충분히 했다(고 나 자신을 설득한다).
이기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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