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04 18:19
수정 : 2012.04.04 18:19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 ‘아큐픽스 마이버드’
지금은 상징성이 희미해졌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 여의도 63빌딩은 비수도권 지역 아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엄마 손 잡고 63빌딩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친구들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같은 표정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수족관과, 마천루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의 풍경에 대해 자랑하곤 했지만, 내가 정작 궁금했던 건 국내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아이맥스 영화관’이었다. 아마 ‘저기서 <우뢰매>를 보면 정말 끝내주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얼마 뒤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찾아간 영화관은 예상대로 신세계였다. 압도적인 공간감 안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날고 기는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 경외심마저 가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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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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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티브이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건 42인치짜리다. 화면이 커진다고 감동의 크기도 같은 비율로 늘어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화면이란 아무리 커도 항상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것. 내 거실의 티브이도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니건만 큰 화면에 대한 갈증은 항상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0인치만 되면 세상 부러울 게 없겠다 싶었는데, 그런 티브이를 사기에는 돈도 공간도 넉넉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낡은 스마트폰 케이스를 바꾸기 위해 들렀던 전자제품 매장에서 독특한 안경을 봤다. 착용과 동시에 영화 <엑스맨>의 사이클롭스가 돼 눈에서 레이저를 쏴댈 것 같은 디자인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작은 노트북에서 재생되는 영상이 이 안경 속에서 극장에 온 것 같은 대형 화면으로 변했다. ‘마이버드’(사진)라는 이름의 이 제품은 이른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HMD)라고 부른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게임기, 티브이 등과 연결해 각 기기의 영상을 안경 속 화면으로 즐기는 시스템이다.
작은 안경 속 세계는 생각보다 근사했다. 아이맥스에서 느낀 정도의 충격은 아니지만, 극장의 작은 상영관을 독점하고 있는 기분은 들었다. 설명에 따르면 4m 앞에서 100인치 스크린을 보는 것 같은 효과라는데, 체험해본 결과 아이맥스는 몰라도 ‘아이하프(Half)’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다소 화질이 떨어지는 게 맘에 걸렸지만, 오히려 구매할 때는 이 점이 맘에 들었다. 두루뭉술한 화질과 밀폐돼 있는 느낌의 극장 스크린 느낌과 닮아서 말이다. 무게가 78g에 불과해 두 시간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점도 맘에 들었다.
하지만 이 안경을 스마트폰과 연결한 채 이동하면서 쓰는 건 무리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중간에 놓인 컨버터와 전선이 거추장스럽고, 해상도가 떨어져 게임을 즐기기에도 적절치 않다. 다만 나만의 극장을 하나 놓고 싶은 욕구에는 어느 정도 부합하는 듯해 예약 구매를 신청하고 왔다. 소비자가격 54만9000원. 터무니없는 가격은 아니다. 제품을 받으면 어떤 영상을 제일 먼저 틀어볼까 생각해봤는데, 현재로서는 ‘가카’가 결단코 하지 않았다던 비비케이(BBK) 연설 영상이 유력하다. 주어가 있는지 없는지 다시 한번 찬찬히 확인해 볼 생각이다.
이기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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