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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0 17:22 수정 : 2012.06.20 17:22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임신 5개월 아내를 위해 구입한 전신베개 30대 배 나온 아저씨에게 딱이네

결혼한 지 딱 10개월째 접어든다. 아내를 세번째 만나던 순간, 이 여자와 결혼하게 될 것 같다고 느꼈다. 결혼은 현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제도라고, 나는 절대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떠들고 다녔던 잘난 주둥이가 부끄럽기는 했다. 하지만 아내와의 결혼은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던 일처럼, 당연하게 느껴졌다.

결혼은 했지만, 당분간 아이는 가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가진다는 건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할 수 없다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육아에 필연적으로 따를 경제적 압박도 부담스러웠다. 아이에게 내 인생을 양보하게 될 것만 같았다.

아내의 생리가 어느 날 멈췄다. 떨리는 손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하던 순간, 아내와 나는 기쁨의 환호 대신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마냥 기뻐할 수 없다는 게 서글펐지만, 뭔가 막막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임신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임부부가 그렇게 많다는 걸, 아이를 가진 것 자체가 축복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잘 낳아서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으로 키울 수 있다면 그걸로도 기쁠 것 같았다.

그렇게 임신 사실을 알고 5개월이 지났다. 아내는 이제 배가 꽤 불렀고,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무엇보다 잠이 많아졌다. 휴일에는 놀랍게도 거의 20시간 정도를 자기도 하는데, 문제는 수면의 질이었다.

바른 자세로 자건 옆으로 누워 자건, 봉우리처럼 솟아오른 배가 숙면을 가로막았다. 자다가 깨기 일쑤였고, 베개는 머리에서 배로, 또 다리로, 왕복열차처럼 몇 번씩이나 바뀌었다. 수면의 질이 높을 리 없었다. 본인에게도, 태아에게도 말이다. 뭔가 해줄 수 있는 걸 고민하다 임신했던 친구를 통해 기능성 침구류를 추천받았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잠자리만 편해도 임신 스트레스가 절반으로 준다고 했다. 모니터상으로 본 침구는 등이 닿는 부분이 비어 있는 구조라 복부에 압박을 덜 받을 것 같았고, 옆으로 자건 엎드려 자건 확실히 편할 것 같았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아내의 힘겨움에 동참하고 싶었다.

이기원 제공
해외 구매대행으로 구입한 리치코의 전신 베개는 10만원 정도. 잠깐이나마 좋은 남편이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었지만 아내의 반응은 생각보다 시큰둥했다. 아내는 처음에 몇 번 써본 뒤,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이내 제품을 외면했다. 차라리 원래대로 자는 것이 더 편하다나 뭐라나. 서양인의 체형에 맞게 디자인돼서 그런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어쨌든 사람마다 호오가 극명히 갈리는 침구류에는 보편타당한 제품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다고 기왕 산 걸 버릴 수는 없어 며칠 전부터 내가 써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코골이와 잠꼬대 등 거의 모든 수면장애를 가지고 있어 항상 무거웠던 아침이 꽤 상쾌해졌다.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었다. 임신중인 아내보다 더 나온 복부, 어지간한 서양 여자 정도의 체형. 디자이너가 이 제품을 만들 때, 딱 나 정도의 여자를 상상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덕분에 잠은 잘 자고 있지만 임신부용 전신 베개가 어울리는 남자가 됐다니, 가슴이 아프다.

이기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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