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04 17:59
수정 : 2012.07.04 17:59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이사 준비하며 마련한 코메론 줄자…정교한 만듦새로 집꾸미기 든든한 지원군
어려서부터 이사에 익숙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이사를 다닌 것만 4번, 중·고등학생이 돼서도 3번은 이사를 다녔다.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다거나, 맹모삼천지교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이것저것 일을 많이 벌였던 아버지 덕에 주거지를 자연스럽게 옮겼고, 가장의 의지를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집에 대한 애착이 없다. 내 집이 있다는 건 한평생 그 집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얘기처럼 들려서, 어쩐지 갑갑했다. 그래서 지금도 내 집이 있는 것보다 전세를 의도적으로 선호한다. 2년이라는 계약 기간만 끝나면 가볍게 떠나버릴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었다.
지금 사는 집의 전세 계약도 끝나간다. 신혼 생활을 시작했던 집이었고, 옥상에 올라가면 고층 빌딩이 없어 시야가 시원하고, 인근 편의 시설도 잘돼 있어 처음으로 전세 연장을 고민한 집이었다. 하지만 곧 태어날 아기와, 버려도 버려도 마법 상자처럼 줄어들지 않는 짐 때문에 이사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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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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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결심하면서 아내와의 대화는 새집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로 집중된다. 도심에서 다소 멀어진다 해도 지금보다 큰 집으로 옮기자는 얘기, 책장을 새로 짠 뒤 거실을 책장으로 꾸미자는 얘기, 침실에는 오직 침대만 놓자는 얘기, 벽지는 꼭 실크 벽지로 하자는 얘기 등등. 그러기 위해서는 계산이 필요했다. 수많은 이사를 겪으며 깨달았던 건 도식적인 평수가 아니라, 각 방의 정확한 치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사하기 전에 무얼 넣고, 무얼 뺄지 그림이 나온다. 이사 후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다.
당장 줄자가 필요했다. 가급적이면 길고 튼튼한. 하지만 동네 철물점에서 파는 줄자는 길이가 너무 짧았고, 금방이라도 고장 날 것처럼 빈약해 보였다. 꼴에 남자라고 다른 건 몰라도 공구만큼은 좋은 걸 사야 한다는 괜한 강박이 고개를 들었다.
마침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코메론(사진)이라는 브랜드를 기억해 냈다. ‘김두관 테마주’로 뉴스의 메인을 장식했던 기업이다. 테마주 어쩌고 하는 건 좀 웃기지만 실제 코메론은 세계 줄자 시장에서 미국의 스탠리워크스, 일본의 타지마사와 함께 시장을 삼분하고 있는 한국 브랜드다. 이름만 세계적인 몇몇 기업과 달리 실제로 시장에서 ‘프리미엄’ 대접을 받는 줄자를 생산한다. 모니터상에서 본 7.5m 길이 줄자는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가격은 1만5천원.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과의 교환 가치를 잠깐 생각하며 쇼핑몰에서 구입했다.
집으로 도착한 제품은 7.5m 길이의 줄자답게 크고 묵직했다. 찬찬히 살펴보니 만듦새가 정교했다. 줄자의 기본인 눈금은 쉽게 길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큼직하게 양면 모두 프린트돼 있었고, 세워놓을 수 있는 바닥과 윗부분 일부를 고무로 덧칠해놔 그립감은 물론이고, 험한 공사 현장에서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딱 봐도 전문가용 같은 느낌이라 괜히 마음이 뿌듯했다.
주말마다 이 줄자를 들고 맘에 드는 집을 보러 다닌다. 재밌게도 이 ‘프로페셔널한’ 줄자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중개인들이 꼭 묻는다. “건축 일 하는 분이세요?” 그럴 때면 공사장 근처도 안 가본 주제로 짐짓 ‘아, 네, 뭐’ 정도로 얼버무린다. 그러면 그들이 알아서 이 집의 약점과 강점을 술술 얘기해 준다. 곧, 좋은 집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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