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18 17:55
수정 : 2012.07.18 17:55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내 ‘어정쩡한’ 소비의 로망을 채워준 단단하고 아름다운 풀턴 우산
누구나 ‘어정쩡한’ 소비의 로망이 하나쯤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생각나 언젠가는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무엇. 나에게 우산이 그렇다. 여러번 써도 쉽게 부러지거나 휘어지지 않고, 표면을 뒤덮은 천의 질감이 금세 시들어버리지 않으며, 모양도 근사한 우산.
얼마 전 여주 아웃렛에 들를 일이 있었다. 그때 한 매장에서 맘에 쏙 드는 우산을 발견했다. 손잡이가 나무로 세공된,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다. 대부분 비싸 보이는 물건은 실제로 비싸다. 그 우산은 20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한심해 죽을 일이겠지만 내게는 꽤나 고민되던 순간이었다. 정말, 갖고 싶었다. 하지만 가격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 미련이 얼룩처럼 남아 마음을 괴롭혔다. 생각해보면 인생을 걸 만큼 큰 금액도 아닌데, 그냥 눈 딱 감고 사버릴걸.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장마가 야속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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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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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속절없이 내리던 어느 날, 마우스의 휠을 돌리며 뉴스를 검색하던 중에 재미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아주 귀여운 비닐우산을 쓰고 있었는데, 풀턴(Fulton)이라는 브랜드였다. 뒤늦게 풀턴이 영국 왕실에서 시행하는 157가지 품질 테스트에 합격해야만 얻을 수 있는 왕실조달허가증(Royal Warrant)을 받아 왕실에 납품되는 브랜드라는 걸 알게 됐다. ‘왕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허영과 검증된 품질이 마음을 붙잡았다. 다행히 서울에도 풀턴 우산(사진)을 파는 작은 매장이 몇 군데 있었다.
매장에는 대여섯 종류의 우산이 있었다. 아주 기본적인 형태의 우산도 있었지만, 노인의 지팡이처럼 생긴 우산이 마음에 들었다. 손잡이가 있어 손에 잡히는 느낌이 좋았고, 기둥의 높이도 5단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돔 형태로 펼쳐지는 모양도 예뻤다. 카본 섬유와 함께 가장 강도가 높은 재질로 알려진 파이버글라스 재질로 만들어진 뼈대의 구조는 눈으로 봐도 단단해 보여 태풍이 와도 끄떡없을 것 같았고 바늘처럼 생긴 천의 끝부분은 특이한 방식으로 보호되고 있어 어지간해서는 쉽게 손상될 것 같지 않았다. 땅을 짚을 수 있게, 우산의 바닥이 목발처럼 고무로 돼 있어 다른 사람의 발등에 상처를 낼 일이 없을 것 같은 점도 좋았다. 무엇보다 가격이 구매 사정권 안에 있었다. 10만원을 기꺼이 지불했다. 가장 분실률이 높은 것이 우산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싸게 주고 샀으니 어딜 가도 우산을 먼저 챙기게 될 테니까. 1만원짜리 우산 열번 잃어버릴 시간 정도만 쓰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언젠가 현재 우산은 고정관념과의 치열한 싸움이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몇백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우산을 드는 건 나약함의 증거로 느껴져 남자들은 비를 그냥 맞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할 때만 우산을 쓸 수 있었다. 과거의 남자들처럼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산 건 아니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도 어쨌든 다행이다. 맨머리로 이 방사능비를 맞고 다녔다가는 탈모가 더 심해졌을 테니까.
이기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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