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9.20 10:41
수정 : 2012.09.2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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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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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좁은 집 수납 걱정 해결해준 슬라이딩 책장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아니, 그건 과거의 말이다. 지금 필요는 소비의 어머니다. 필요한 건 사버리는 게 더 빠르고 편한 세상이니까.
연초부터 야심차게 계획했던 이사 계획이 전셋값 폭등으로 무산되고, 다시 같은 집에 2년을 더 눌러앉기로 결정하면서, 집 안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지금 사는 집은 날마다 쌓여가는 각종 물건들의 팽창으로 빅뱅이라도 일으켜 버릴 기세였다. 쓰지 않는 짐을 버리거나 가구의 배치를 바꿔볼까 생각도 했지만, 모두 여의치 않았다. 버려도 될 만한 짐은 생각보다 없었고, 가구의 배치를 바꾸기에는 집 안에 여유 공간이 거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오랜만에 만화방으로 향했던 날, ‘유레카’를 외쳤다. 해마다 수백권씩 발매되는 신작을 감당하지 못한 만화방 주인들이 짜낸 묘안, 슬라이딩 책장이었다. 원래 책장 두께만큼의 공간만 있으면, 2배가량의 책과 소품들을 적재할 수 있었다. 저거라면 부족한 수납공간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검색창에 ‘슬라이딩 책장’을 넣었다. 슬라이딩 책장을 만드는 사이트는 여기저기 몇 군데 있었다. 각 사이트의 견적을 내보니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 크기의 책장을 기준으로 대략 15만원 정도 차이가 났다. 하지만 평상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이렇게 큰 가구는 한번 할 때 잘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15만원의 차이를 무시하고 좀더 신뢰가 가는 사이트에 맡기기로 했다. 설치비는 총 90만원이었다. 나름 큰돈이었지만, 그건 투자에 가까웠다. 그만큼의 소득 대비 효용을 기대할 수 있었다.
책장을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정밀했다. 전체 가로와 세로의 길이를 측정해야 했고, 단과 열의 크기와 수를 정해야 했다. 메일로 서로의 의견을 몇 번이나 교환한 끝에 완성된 설계도가 나왔다. 크기만큼이나 중요한 책장의 외피 무늬를 정하는 단계까지 끝낸 며칠 후,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간단한 작업 같았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필요했다. 뒤편의 책장 6짝, 앞면 5짝, 모두 합해 총 11짝의 책장을 방에 들이는 것도 문제였지만, 정작 큰 문제는 책장을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 일종의 레일을 까는 일이었다. 거의 4대강 수준의 대규모 토목 공사였다. 책장이 저절로 움직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수평을 맞추고(실제로 대부분의 집 바닥은 평행이 아니라 살짝 경사가 있다고 했다), 레일을 끼우기 위한 홈을 현장에서 팠다. 생각보다 먼지가 심했고, 실제 설치 시간만 거의 2시간 넘게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슬라이딩 책장이 완성됐다. 원래보다 조금 더 방의 면적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2배 가까이 늘어난 책장은 획기적인 공간의 확장을 가져다줬다. 그건 책장이 책을 넣는 용도만이 아니라, 거실과 작은방을 지저분하게 수놓던 잡동사니들까지 품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둘 데를 찾기 어려웠던 카메라와 피에스피(PSP)를 비롯한 아이티(IT) 기기들, 틈날 때마다 모아오던 피규어까지 뒤편 책장에 둘 수 있었다. 게다가 책장을 여닫는 일 자체가 묘하게 비밀스런 느낌도 줬다. 책장을 좌우로 밀고 당길 때마다 숨겨진 개인 금고를 여닫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좀 웃기는 일일까.
이기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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