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05 17:45
수정 : 2012.12.08 13:33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예쁜 재떨이를 찾다가 발견한 사탕 그릇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 모든 흡연자가 그런 것처럼 금연 시도도 많이 했지만 항상 실패했다. 사실은 담배를 꼭 끊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폐암으로 죽을 확률과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 중 어떤 쪽이 더 높을까 하는 생각.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에서 이런 작은 기쁨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담배가 침잠하고 싶을 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한 공간에서 피우는 것만 아니라면, 흡연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줬다. 덕분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있는 작은 창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제일 위층이라 이웃에 불편을 줄 일도 없었다. 그 작은 창 앞에 작은 크리스털 재떨이를 하나 놔뒀는데 얼마 전 실수로 깨져버렸다. 새로운 재떨이가 필요했다. 원래 있던 것이 고장나거나 해지면 다음에 살 때는 어떻게든 더 좋은 제품을 경험하고 싶었다. 새로 사야 할 재떨이도 그랬다. 기왕이면 좋은 재떨이, 아름다운 재떨이였으면 했다. 담배도 몸에 안 좋다는데, 재떨이까지 못생기면 몸에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학사주점에나 있을 것 같은 플라스틱 재떨이는 죽어도 싫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둔 제품은 있었다. 주황색 말이 그려져 있던 작고 우아한 에르메스의 재떨이. 거기에 담배를 두면 흩날리는 담뱃재마저 황홀할 것 같았지만 억 소리 나는 가격 때문에 애초에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비싼 제품이 아니라도 맘에 드는 재떨이는 담배 종류만큼이나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지식쇼핑에도, 중고나라에도, 재떨이는 있었지만 ‘예쁜’ 재떨이는 없었다. 각종 크리스털 브랜드도 뒤져봤지만 재떨이는 아예 없거나, 디자인이 예쁘지 않거나, 너무 비쌌다.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이런 ‘레어 아이템’을 구할 때 가장 유용한 건 역시 이베이다. 당장 유럽만 해도 예쁜 빈티지 재떨이가 많을 것 같았다. 검색창에 ‘ashtray’를 미친 듯이 넣어봤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기 어려웠다. 믿었던 이베이마저 기대를 배반하자 뇌 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급격히 짜증과 피로가 몰려왔다.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고작 재떨이 하나에 이 난리를 치고 있나. 이게 무슨 허황한 짓거린가. 차라리 종이컵을 재떨이로 쓰고 말지. 예쁜 재떨이고 뭐고, 다 귀찮기만 했다.
그렇게 반쯤 구매를 포기했을 때, 우연히 들른 리빙숍에서 눈에 딱 꽂히는 제품을 발견했다. 모양과 색깔이 예뻤고, 가격과 크기는 적당했다. 이거야말로 재떨이로 쓰기에 딱 어울리지 않는가 싶었지만, 제품 앞에는 ‘캔디볼’(Candy Bowl)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사탕을 담아놓으라고 만든 용기였던 셈이다. 실망스러웠다. 역시 당분간 맘에 드는 재떨이는 포기해야 하는 건가 싶어 상점문을 나서려던 순간 ‘용도변경’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다. 모든 건 쓰기 나름이다. 내가 식기로 쓰면 식기고, 재떨이로 쓰면 재떨이다. 캔디볼이라고 해서 재떨이로 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2만5000원을 주고 구입한 캔디볼은 지금 재떨이로 변했다. 색깔이 짙어 안이 지저분해 보이지도 않고, 뚜껑이 있어 냄새가 날 우려도 없다. 마치 올려두라는 듯 담배의 지름과 딱 맞는 톱니바퀴 모양의 홈도 있어 아주 만족스럽게 잘 쓰고 있다.
글·사진 이기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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