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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02 18:14 수정 : 2013.01.02 18:14

이기원 제공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글렌케언 위스키 글라스

어릴 때는 소주를 좋아하는 선배들이 부러웠다. ‘캬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소주 맛을 온몸으로 느끼던 선배들은 왠지 어른처럼 느껴졌다. 살면서 고난이랄 게 별로 없어서인지, 입맛이 원체 어려서인지 소주를 좋아했던 기억은 없다. 어쩔 수 없이 마신 적은 많았지만(가끔은 소주가 달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꾸준히 좋아하기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우아한 레드와인이 입에 잘 맞았던 것도 아니었다. 좋아했던 유일한 주종은 맥주였다. 혀에서 고소한 기포가 터질 때, 그리고 그 기포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갈 때의 축제 같은 쾌감이 좋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계절처럼 조금씩 변해 간다더니, 요즘은 다른 주종에 관심이 생겼다. 위스키다.

한국에서 위스키는 폭탄주의 상징, 허영의 산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맛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상당히 훌륭한 주종이다. 소량의 원액을 입에 머금고 있으면 와인처럼 너무 애쓰지 않아도 미각이 주는 호사를 느낄 수 있고, 포만감도 덜하다.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하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무엇보다 가격 대비 효율이 좋다. 비싼 걸 사려면 끝도 없지만, 쓸 만한 위스키 한 병의 가격은 면세점에서 대략 5만원 정도. 그리고 한 병이면 최소 한 달은 마실 수 있으니 사실 그리 턱없는 가격은 아니다.

잘 모를 때는 위스키를 얼음 위에 부어 마시거나 소위 ‘양주잔’이라 불리는 검지만한 크기의 샷 글라스에 부어 마셨다. 코와 혀로 마시기보다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독주의 짜릿함으로 마셨기에 굳이 좋은 글라스를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경험이 쌓여 가면서 전용 잔의 필요를 느끼게 됐다. 코로 향을 먼저 마시고, 술을 입에 머금은 뒤, 목으로 천천히 넘기는 일련의 과정. 이 중 첫 과정인 향을 음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구입한 것이 글렌케언(Glencairn)의 유리잔(사진)이다. 글렌케언 글라스는 위스키를 음미하는 용도로 가장 많이 쓰이는 범용 잔이다. 2001년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생산됐다는데 고작 10년 남짓한 시간에 이 제품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잔이 된 건 위스키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모양 때문이다. 이 잔은 튤립처럼 아래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이 형태가 향을 모아주기 때문에 잔을 기울여 위스키를 마시면 모여 있던 향이 코로 함께 쑤욱 들어온다. 그 덕분에 이제야 좀더 제대로 위스키를 즐기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값은 인터넷에서 대략 1만5000원. 잔 하나의 값으로 결코 싼 건 아니지만, 직접 만져보니 그만한 값은 하는 것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맥주를 유독 좋아했던 작가지만, 어느 순간 맥주 대신 위스키에 빠졌다. 그가 낸 <위스키 성지 여행>은 수없이 쏟아져 나온 와인 서적처럼 썩 괜찮은 입문서다.

2013년을 이틀 앞둔 날, 혼자 식탁에서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생각했다. 새해에는 나도 하루키처럼 한번쯤은 괜찮은 글을 써볼 수 있을까. 결론은 비교적 빠르고 쉽게 났다. ‘안될 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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