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23 20:33
수정 : 2013.01.23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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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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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펠리컨 2370 라이트
‘군납용 제품’이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다. 윤리적으로 보자면 누군가를 죽이고 무언가를 파괴하는 데 일조해야 하는 비정한 물건을 일컫는 말.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쓰일 수 있는 상품으로 보자면 얘기가 다르다. 군납용으로 쓰이는 제품이란 그 실용성과 내구성을 인정받았다는 얘기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말이다. 그래서 군납용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제품들은 대부분 그 품질에 대해 묘한 확신을 준다. 물론 ‘맛스타’ 같은 식음료는 제외하고.
얼마 전 눈이 아주 많이 왔던 날, 갑자기 집 안의 전기가 모두 끊겼다. 오랜만에 맞은 정전이었다. 빛이 사라졌고, 온기도 사라졌다. 휴대폰으로 빛을 밝히며 손전등을 주섬주섬 찾았지만 준비해두지 않은 물건이 갑자기 나타날 리 없었다. 전기가 금세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주 기초적인 재난용품 하나 준비해놓지 않은 무책임한 가장이 된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웠다. 다른 건 몰라도 손전등 하나 정도는 구비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고민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전등의 세계는 넓고도 깊었다. 아웃도어 라이프는 질색인 채 인도어 라이프만 즐겨왔던 입장에서 손전등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 게다가 제품의 특성이란 것이 다들 비슷했다. 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마다 야외로 캠핑을 나갈 것도 아니고, 1년에 한두번 쓸까 말까 할 텐데 굳이 좋은 걸 사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재난용품은 결국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물건이다. 그건 결국 비상시를 얘기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어느 정도 공인된 제품을 사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건 펠리컨 2370 손전등이다. 제조사인 펠리컨 프로덕트는 미군과 나토(NATO)군에 제품을 납품하는 일종의 군수회사다. 펠리컨의 제품 중 가장 유명한 건 촬영 장비나 기타 중요한 물건을 넣는 하드 케이스지만 이 외에도 백팩이나 군용 노트북, 손전등 같은 제품도 만든다. 오직 실전에 유용할 법한 제품들만 만드는 회사인 셈이다.
물론 펠리컨의 제품보다 더 싸고 성능이 좋아 보이는 제품들도 많았지만 ‘군납용’이라는 수식어 하나에 벌써 몸도, 마음도, 카드도 넘어간 상태였다.
제품의 사양도 썩 맘에 들었다. 최대 158미터 전방까지 비출 수 있는 성능 높은 엘이디(LED) 전구를 가지고 있었고, 110루멘에서 10루멘까지 3단계로 밝기를 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 손에 쥐어본 다음 제일 좋았던 건 생김새 그 자체였다.
이 손전등에서 이유 없는 디자인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격자무늬로 파인 몸통을 비롯해 밝기 조절을 위한 다이얼, 전원 버튼마저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해 만들어진 흔적이 역력했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기능을 위한 최소한의 형태만 남겨놓은 우직한 모습은 어떤 본질에 다가선 것 같았다.
불을 다 끈 컴컴한 방 안에서 라이트를 비춰봤다. 컴컴했던 방 안이 금세 환해졌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소년의 마음이 이런 걸까. 나는 지금 다음 정전을 기다리고 있다.
이기원 <젠틀맨 코리아>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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