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6 20:50
수정 : 2013.03.06 20:50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락앤락 스피드쿡 라면냄비
미식가들이 넘쳐난다. 음식을 주제로 한 블로그는 어림잡아도 수백개가 된다. 나는 입맛이 저렴한 편이라 잘 조리된 음식을 대해도 감동은 평균 이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만 아니면 대체로 만족하고 먹는다. 특별히 가리는 것도 없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가지 음식이 있다. 라면이다.
올해가 한국에서 라면이 생산된 지 50년 되는 해란다. 전쟁통의 심각한 기근을 싼 가격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된 지 벌써 반세기. 그때 라면은 빈자들의 가장 친근한 벗이자 가격 대 효용비가 뛰어난 음식이었을 것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라면 시장의 규모는 엄청나다. 통계를 보면 한해 동안 국내에서 팔리는 라면은 34억개. 매출로 따지면 대략 2조원 가깝다. 국민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는 라면의 개수가 평균 70여개. 나는 평균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라면을 소비하고 있다. 라면으로만 하루 세끼를 다 먹는 일도 꽤 있으니까.
나는 라면을 좋아한다.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냥, 좋아한다. 주기적으로 한번씩 그 인공적인 짠맛을 먹어줘야 직성이 풀린다. 그게 아무리 엠에스지(MSG) 범벅이고 건강에 안 좋다 해도, 라면을 먹을 때면 진정 행복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가족이 그런 것처럼,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더 무심해지기 쉽다. 생각해 보니 라면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도 정작 라면을 맛있게 먹는 방법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슬슬 수명이 다하는 것 같은 스테인리스 냄비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던 중이었다. 기왕 먹는 라면, 좀더 맛있게 먹고 싶어 양은 냄비를 하나 살까 했지만 오래 쓰면 중금속 성분이 묻어나와 건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을 접었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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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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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락앤락 스피드쿡 라면냄비’라는 라면 전용 냄비다. 대단한 기술이 있어 ‘전용’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붙은 건 아니다. 다만 라면을 끓이는 데 최상급으로 치던 양은 냄비처럼 코팅 알루미늄 재질로 만들어졌다. (양은 냄비는 양은이 아니라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서양에서 가져온 은색 냄비’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집에 와서 기쁜 마음으로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렸다. 적절한 물의 양이 빗금으로 그려져 있어 양을 맞추기가 쉬웠다. 열의 전도를 차단하는 세라믹 손잡이는 뜨거움이 덜했다. 사고가 날 위험이 덜할 것 같았고, 뜨거운 걸 잘 쥐는 사람이라면 냄비를 옮기는 데 굳이 장갑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알루미늄 소재답게 냄비는 조증 환자처럼 빨리 끓어올랐다. 이런 속성이 왜 라면과 어울리는 건가 했는데 답을 찾았다. 빨리 끓는 만큼 빨리 식는 덕분에 가스레인지에서 들어 올리던 순간의 ‘꼬들꼬들한’ 면발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됐다. 라면의 생명은 면발이라 했던가. 덕분에 식감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고, 라면을 먹는 기쁨이 훨씬 커졌다. 게다가 뚜껑이 라면을 덜어 먹기 쉽게 편편한 형태라 라면 먹는 재미도 더했다. 하지만 오히려 진가는 라면보다 비빔면을 먹을 때 나타났다. 비빔면을 먹을 때 가장 귀찮은 일이 뜨거운 물을 비우는 일이었는데, 물을 쉽게 비울 수 있는 작은 홈이 나 있어 편리했다.
조금 전에도 이 냄비에 라면을 해 먹었다. 주위에서는 이제 내장지방에 신경써야 할 나이라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아직은 이 맛있는 걸 포기 못하겠다. 이렇게 훌륭한 조력자도 나타난 마당에는 더더욱.
이기원 <젠틀맨 코리아>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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