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3 18:47
수정 : 2013.04.0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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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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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샤워를 좋아한다. 그래서 샤워를 오래 한다. 보통 아침 샤워를 할 때는 최소 20분 정도는 온수를 틀어놓고 있는다. 같이 사는 여자가 자기보다 샤워를 오래 한다고 나무랄 정도다. 그렇다고 비누칠을 두번 세번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샤워기를 틀어놓고 가만히 물을 맞고 있는다. 한국 같은 물 부족 국가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죄악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사치도 없으면 인생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전 저녁 뉴스의 물 부족 관련 리포트를 보면서는 새삼 경각심이 들었다. 물을 아껴야 한다는 경고가 수도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의 음모론 같은 게 아니었다. 한국이 정말 심각한 물 부족 국가가 되면, 내가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그 짧은 순간마저 뺏길 텐데.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샤워 시간을 단축하는 거지만, 아직은 그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절수 샤워기’를 검색해 봤다.
아, ‘얻어걸린’ 기분이란 이런 거였다. 정말 절수 샤워기가 있었다. 게다가 절수형이지만 수압은 더 막강해서 괴물 샤워기 어쩌고 하는 홍보성 문구도 붙어 있었다. 홍보 내용에 따르면 30~50%의 절수 효과가 있고, 일반 샤워기 헤드의 2.5배 이상의 수압 상승 효과가 있으며, 음이온 방출 효과도 있단다. 음이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절수 효과와 수압 상승은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절수형 샤워기도 가격대가 여러 가지였다. 보통 같은 조건이라면 가장 저렴한 제품을 사는 게 옳지만 이번에는 생각이 달랐다. 아마도 오랜 개발 시간이 필요한 제품이었을 텐데, 이런 제품이라면 최초로 개발된 오리지널 제품을 사는 것이 정당해 보였다. 그래서 1만원대의 저가형 제품 대신, 3만원대의 소프롱이라는 회사 제품(사진)을 샀다. 절수형 고압력 샤워기를 처음 개발한 한국 회사다.
샤워기의 외형은 별다를 게 없었다. 물이 나오는 구멍이 육안으로 쉽게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았다는 것 정도를 빼면. 헤드를 교체했더니 처음에는 울컥거리다가 곧 새하얀 물줄기가 나왔다. 전보다 가느다란 물줄기였지만 훨씬 강력했다. 묘하게 황홀한 기분이 됐다. 이 샤워기로 몸에 물을 끼얹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남자와 첫 데이트를 나가기 직전의 여자 같은 심정으로 옷을 벗고 물을 틀었다.
수압이 강해서인지 처음에는 다소 따가운 느낌도 있었지만 두터운 살집 덕에 이내 수압에 적응했다. 수압이 강해진 만큼 가끔 마사지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생식기 쪽에 물줄기를 갖다 댈 때는 야릇한 쾌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장단이 있었다. 예전 샤워기를 쓸 때 물의 절대적인 양이 많아 풍족한 느낌이었다면, 이 샤워기는 치약의 마지막 한방울을 짜낼 때처럼 아끼고 아껴 쓰는 느낌이었다. 샤워 자체의 만족도는 오히려 예전이 나았다. 하지만 나처럼 샤워에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는 아내는 수압이 높아 속이 시원하다며 만족스러워하고 있으니 사람마다 만족도는 다를 테다.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아 샤워기를 바꾼 뒤에도 여전히 20분 정도는 샤워를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물을 조금은 절약하고 있다는 실감이 얄팍한 안심을 주기도 한다. 3만원을 투자해서 얻는 안도감치고는 썩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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