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22 18:46
수정 : 2012.02.22 18:46
[매거진 esc] 서효인의 야구탓
직장 선배에게 담요를 선물했다. 내가 좋아하는 팀의 로고가 새겨진 담요다. 담요의 용도는? 딱, 딱 차진 소리를 내며 사이좋게 둘러앉아 화투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야구를 위해서다. 아직 쌀쌀한 4월, 담요는 센스 있는 야구팬의 ‘잇’(It) 아이템이다.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팀을 응원하는 선배와 나는 같은 색 담요를 두르고 4월의 야구장을 함께 가기로 했다. 어서 와라, 4월아. 빨리 와라, 야구야.
하필 몇 년째 순위표 아래에 위치한 팀을 응원하는 선배가 있다. 해마다 설날 즈음이면 핑크빛 희망을 늘어놓는다. 부상에서 회복된 선수가 전성기 시절 홈런 개수를 기록하고, 유망주의 가능성은 이번 시즌 들어 화려하게 폭발할 것이며, 외국인 선수는 15승은 간단히 찍을 것이다. 그리고 추석 즈음이면 내 다시는 야구 보나 봐라, 이를 부득부득 간다. 그리고 다시 설 즈음에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김 팀장의 아들은 이제 유치원에 들어간다. 팀장은 벌써부터 아동용 글러브를 지르고 아들의 손이 더 크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아들과 캐치볼을 하는 건 그의 첫번째 꿈이었다. 두번째 꿈은 아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가는 것이다. 특별히 주문한 작은 사이즈의 야구점퍼를 아들에게 입힌다. 코흘리개 녀석이 팔짝팔짝 뛴다. 그래, 공부는 못해도 아빠랑 같이 야구 보며 자라다오. 팀장은 오늘도 야근이다.
그녀는 연애하면서 야구를 알았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힘겹게 자리를 잡은 애인은 골수 야구팬이다. 후배는 남자친구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같은 질량으로 좋아하려 노력했다. 피시 게임이나 중국음식, 등산은 실패했지만 야구는 대성공이었다. 그녀는 애인보다 더한 야구팬이 되어 경기 스케줄을 두루 꿰고, 예매에 힘썼다. 야구가 없는 지난겨울의 데이트는 너무나 지루했다. 그녀는 봄을 기다린다.
모든 좋아함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다. 우리는 야구를 믿고 있다. 내야의 흙이 불규칙 바운드를 최소화해줄 것이라는 믿음. 평범한 타구는 쉽게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 내 위쪽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맥주 캔 따위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거 말이다.
이와 동시에, 들려오는 추잡한 소문이 모두 거짓이길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불법 베팅 사이트, 조직폭력, 경기조작, 협박, 거래…. 사람들의 일상성을 깨뜨리는 성난 단어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저 음산한 신기루에 불과했으면 좋겠다. 믿음이 깨진 한순간은 그 순간의 이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믿는다. 야구를 위해 젊음을 바친 청년들의 순수한 열정을.
서효인 시인·문학인야구단 ‘구인회’ 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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