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21 18:31
수정 : 2012.03.21 18:31
[매거진 esc] 서효인의 야구탓
누구에게나 전성기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전성기이든, 그것은 곧 끝나기 마련이다. 시간은 결국 순간이 모여 만들어진 서사이며, 우리는 서사의 어떤 파편을 함께한다. 그의 전성기를 우리가 같이 보았다면, 그것은 당신과 내가 동시대를 살았다는 확연한 증빙이 된다. 당신도 보았는가? 나도 보았다. 1990년대 중반의 이종범. 그는 역사상 가장 화끈하게 불타오른 선수이고 동시대의 증빙이다.
누구는 그 때문에 잠실구장에서 ‘목포의 눈물’의 구슬픈 멜로디를 환희롭게 부를 수 있었다. 누구는 그 때문에 혈압이 오르고 애가 탔다. 그는 관중석에서 뛰어! 하면 2루로 뛰었고, 뛰어! 하지 않았음에도 3루까지 내달렸다(물론 세이프). 경기장에 조금 늦게 도착하면 주자는 아무도 없는데 전광판에 찍힌 숫자 ‘1’이 선명했다(선두타자 초구홈런). 결정적인 순간에 짜릿한 3루타를 치고 손가락 하나를 편다(폭풍 같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1994년 그의 기록이다. 타율 0.393 안타 196 홈런 19 도루 84. 타율 7리, 안타 4개, 홈런 1개를 까치밥처럼 남겨놓은 건 훗날 기록지를 살펴보는 자의 현실감각을 돕기 위함이었을지도. 그는 게임의 지배자였다. 그리고 게임을 지배했던 청년은 올해 우리 나이로 43살이 되었다. 자, 이쯤에서 주위에 있는 마흔셋의 남성을 떠올려보라. 나는 32살에 불과함에도 배가 불룩하고, 10초 이상 못 달리며, 야구를 하기 전 스트레칭을 하면 뼈마디가 발광한다.
그러나 이종범도 세월을 거스르지는 못하고 평범한 성적을 내는 평범한 선수가 되었다. 레귤러로 뛰는 경기보다 후보로 대기하는 경기가 더 많다. 가끔 안타를 치고 가끔 호수비를 펼치지만 3루타는 희미한 기억이 되었고, 난폭한 슬라이딩보다는 완숙한 예측 수비를 즐긴다. 누군가는 은퇴를 종용하고, 어떤 팬들은 거기에 동조한다.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이는 그에게 맥주 캔을 던진다.
그는 전성기의 선수가 아니다. 그저 삶을 유지하는 중이다. 끈질김과 인내심, 자기 벼르기, 한창 날릴 때의 경험이 몸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선천적인 감각을 40년 지녀온 몸은 지금쯤이면 지쳤을 것이고, 그래서 쉬길 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정신만은 아직 그라운드를 강렬히 원하는 것 같다. 그의 정신은, 아직 전성기다. 그의 전성기는 갱신되고 있다.
보통의 경우, 많은 사람은 전성기는커녕 삶을 유지시키는 일에도 힘겨워한다. 그럴 때 나는 마흔이 넘은 야구 선수의 얼굴을 찬찬히 본다. 시커먼, 기미와 주름이 있는 얼굴. 그러나 빛나는 눈빛. 그리고 거울을 본다. 우리의 정신은 어디에 있나. 새로운 시즌이다. 그의 정신을 보는 재미로, 나는 야구를 볼 것이다.
서효인 시인·<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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