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04 18:20
수정 : 2012.04.04 18:20
[매거진 esc] 서효인의 야구탓
바람이 봄을 이기고 있다. 어느덧 4월이라 가벼운 옷을 입고 나오면, 바람은 더 흉악하게 불어댄다. 휘이익. 쉬이익. 꽃샘추위라고 하지만 이 정도 시샘은 도가 지나치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가고 봄은 바람한테 졌지만 시간은 바람을 이길 것이다. 시간은 엄청나게 위대하고 믿을 수 없이 허망하다. 그렇다. 시간이 간다.
4월이면 프로야구가 시작한다. 새로운 시즌에는 장밋빛 전망이 향기를 퍼트리고, 잔디는 더 푸른 것 같고, 모두가 잘될 것 같다. 애인도 생길 것 같고, 취직도 할 것 같고, 학점도 더 잘 나올 것 같고, 살도 빠질 것 같다. 그리고 우리 팀이 우승할 것 같다. 4월은 행복하구나. 그렇게 바람은 잦아들고 야구는 시작한다.
내가 속한 사회인 야구 리그는 개막 뒤 벌써 2게임을 진행했다. 저번 주말에 한 게임은 찬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고생 좀 했다. 외야수는 뜬공을 놓치고 바람 탓을 했다. 투수는 크나큰 홈런을 내주고 바람이 문제라고 했다. 중심 타자는 찬스에서 범타로 물러나며 이게 다 바람 때문이라고 했다. 밖은 바람이 여전하였다. 4월은 행복하구나, 야구를 보고 야구를 할 수 있어서.
지난 원고에서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을 다뤘다. 그에 대한 애정과 근심을 글에 담으려 했지만 나의 맘은 크게 실패했다. 며칠 뒤 바람은 은퇴를 발표했다. 만우절 거짓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아니었다. 그는 은퇴했다. 지속되고 있던 그의 ‘정신의 전성기’ 또한 마감된 것 같다. 이제 갱신될 전성기는 없다.
프로야구에서 구단과 팬의 관계는 무엇일까. 갑과 을일까. 친한 친구일까. 그렇고 그런 사이일까. 대부분의 구단은 팬을 모르는 사람 내지는 시끄러운 스토커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팬이 사랑하고 팀에 공헌한 이른바 ‘레전드’를 내치는 여러 구단(혹은 현장)의 행태는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팬은 결국 경기장으로 다시 찾아들고 응원가를 부른다. 팬은 그런 사람들이다. 구단(혹은 현장)은, 뭐하는 사람들인가.
대기업의 홍보 혹은 생색의 수단이 야구단이라면 이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이 땅의 기업들은 노동의 유연성(이라 쓰고 멋대로 해고할 권리로 읽는다)을 갈구하며, 사람을 독하게 굴리는 것으로 경쟁력을 유지한다. 여기엔 ‘인간’은 없고 ‘인력’(人力)만 존재한다. 몇억 연봉을 받는 선수도 예외가 아니다. 몇만원을 티케팅으로 쓰는 팬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번 봄에는 바람이 없다. 흘러가는 시간에 바람은 졌고, 이제 불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요 며칠 유독 바람이 거세더니…. 개막전에서 그가 타구를 날리고 배트를 던지는 모습을 보길 원했던 바람은 이내 믿을 수 없이 씁쓸하고, 엄청나게 허망한 바람이 되고 말았다. 시간은 흐르고, 야구는 계속될 것이지만.
서효인 시인·<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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