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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서효인의 야구탓
요즘 야구 때문에 괴롭다. 겨울 내내 흐뭇한 마음으로 기대를 거듭해왔던 응원하는 팀이 매일같이 진다. 게임 내용도 엉망이고, 작전은 내는 족족 실패한다. 역전패는 쉽게 당하고 역전승은 거의 없다. 이런 야구를 보려고 한겨울 매서운 추위와 폭설과 건조한 바람을 이겨낸 것이 아닌데 말이다.야구팬의 감정이 하루 단위로 아니, 이닝 단위로 아니, 아웃카운트 단위로 요동치게 된 것은 티브이 중계 탓이 크다. 1990년대 초에 나는 야구 스코어를 확인하기 위하여 유료 전화 서비스를 어머니 몰래 이용하다가 그달 전화 요금이 청구되는 날 대단한 곤욕을 치렀다. 어쨌든 예전에는 경기 중간에 경기에 대한 소식은 기껏 ‘몇 대 몇’ 정도가 전부였다. 하이라이트라 해봐야 고 송인득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짤막한 프로그램이 다였다(물론 그의 목소리는 멋졌다). 그러니 누가 엉성한 실책을 했는지, 투수교체가 시원찮았는지, 더그아웃에서 낄낄거렸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던 것.
티브이 카메라는 응원하는 팀의 결정적 실책이나 그 팀에 불리한 판정을 한 심판의 역동적인 포즈를 얄밉게 연속해서 보여준다. 느린 화면에는 왜인지 좀 모자라 보이는 우리 팀의 어린 선수들이 다소 멍청한 표정으로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 감독은 허탈하게 웃거나 투덜거린다. 이런 모습까지 우리는 다 봐야 하는 것이다. 이게 다 중계 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멀지 않은 과거, 라디오 중계나 어설픈 티브이 중계를 보며 카메라가 따라가지 못하는 야구의 빈곳을 찾아 골똘히 상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야구팬은 그런 거 못 견딘다. 베이징 올림픽 때 현지 중계진의 어설픈 화면 구성이 얼마나 답답하던지!
폭발적으로 증가한 야구의 인기는 133경기 중계와, 중계 기술의 발달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요즘 보기 드물게 3대가 함께 살면서 서로의 결혼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한 여자의 숨겨진 딸이 그 여자가 새로 결혼한 집의 장남과 결혼하는 드라마를 보기 싫다면, 그냥 야구를 보면 된다. 퇴근 후에 치킨집에서 맥주를 가볍게 마실 때도 텔레비전에서는 야구를 한다. 야구 끝나면 각 채널에서 미녀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생방송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하고, 오전에는 그걸 또 재방송한다. 바야흐로 ‘야구천국 불신지옥’이랄까. 나와 당신이 만약 야구를 싫어하는 선량한 시민이라면, 지금 이곳은 지옥일지도 모른다.
요즘 같아서는 야구 조금 쉬고 싶다. 어떤 정보도 없이 그저 9시 뉴스 끝나고 이어지는 스포츠 뉴스를 기다리며 ‘오늘은 이겼을까 졌을까’ 심각했던 기억이 새삼 뜨끈하다. 하지만 중계방송은 나를 또 붙잡겠지. 야구가 나를 미쳐버리게 하는 봄의 복판, 유황불 같은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이기려나? 그래, 이곳이 야구천국이려니, 나는 이렇게 야구라는 신앙에 빠져 있다.
서효인 시인·<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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