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6.06 18:03
수정 : 2012.06.06 18:03
[매거진 esc] 서효인의 야구탓
“IMF가 무엇의 약자인지 맞히시오.” 이런 문제가 영어 주관식으로 나왔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마다 금을 모아 나라를 살리자고 나섰다. 해고를 당하거나 가게가 망했다. 수학여행은 무박 2일 견학으로 대체되었다. 게스 매장이 줄어들고, 유학생이 돌아왔다. 그렇다. 1997년 12월3일, 외환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90년대 중반 박찬호는 홀연 미국에 건너갔다. 1997년부터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로 뛰었고, ‘코리안 특급’이라는 손발 오그라드는 별명이 어울릴 만큼 크게 활약했다. 시원한 강속구로 덩치 큰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가 뱉는 미국식 한국어(?)는 조금 거슬렸지만, 그것도 다 성공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을 터. 그는 아이엠에프 시절, 우리의 영웅이었다.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이면 아버지와 티브이를 보았다. 나는 학원에 다닐 돈이 없었고, 아버지는 다닐 직장이 없었다. 박찬호 도우미를 보며 아메리칸드림에 빠졌다. 박찬호의 승리를 날려먹은 불펜이나, 실책한 야수는 악몽 같았다. 메이저리그는 꿈이었다. 환상적인 경기장과 행복해 보이는 관중. 경기가 끝나면 승부와 상관없이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암울한 뉴스, 빈약한 주머니, 갚아야 할 돈.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같이 싸우거나 둘 중 한 명은 집에 없었다. 물론 나도 ‘이놈의 집구석!’ 하는 마음으로 친구들이 보내는 삐삐 수신음만 기다리고 있었다. 박찬호는 거의 5일마다 등판을 했고, 5일에 한번은 뭔가 기대할 것이 있어서 버틸 만했다. 그가 이기는 것이 우리가 이기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길 게 없었으므로 대신 그가 이기는 것을 바랐다. 그렇게 20대 청년은 거대한 감정이입을 등지고 마운드에 올랐다. 태평양 건너, 세계 최강 대국에서.
내가 기억하는 박찬호의 인상적인 장면은 실패한 돌려차기다. 1루에서 사소한 시비가 붙었고, 박찬호는 미국식 복싱이 아닌, 한국식 발차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박찬호는 문대성도 아니었다. 그의 몸은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이처럼 낙하했다. 아쉬웠다. 그때 우리는 누구라도 실컷 때려주고 싶었으니까!
박찬호는 돌아왔다. 미국 서부와 동부를 모두 거쳐 일본까지 지나, 이제야 한국에 왔다. 압도적인 강속구나 유연한 슬러브를 던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떤가. 마운드에 다른 선수가 아닌, 박찬호가 서 있다. 그것만으로 지나간 고난과 역경이 모두 친근해져서, 너무나, 좋다.
서효인 시인·<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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