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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환담하는 박정희(왼쪽). 그가 롤모델로 삼았던 메이지(명치)유신의 지사들.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가운데), 역시 그가 따라 배우고 싶었던 일본 쇼와(소화)유신의 2·26 쿠데타. 황도파 군인들이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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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④ 유신의 정신적 뿌리
오노와 박정희는 ‘부자관계’였단 말이냐
아기가 태어날 때 미리 이름을 지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박정희는 비상조치를 준비하면서 이 조치를 무엇이라 부를지를 미리 정해놓은 것 같지 않다. 이 조치는 한동안 ‘10·17 특별선언’이나 ‘10·17 비상조치’라고 불렸다. 이 조치로 탄생한 비상국무회의는 열흘 뒤인 10월27일 태어나서는 안 될 이 아이의 이름을 유신이라고 지었다. 유신이란 말은 일본의 명치유신(메이지유신)을 통해 익히 알려진 말이긴 했지만, 역사책에나 나오는 단어였지 이렇게 현실로 툭 튀어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10월17일에 발표했던 특별선언에도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나올 뿐 유신이 특별히 강조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유신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전인 <시경>의 대아문왕편(大雅文王篇)에서 문왕의 국정 혁신을 칭송하며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개혁으로) 그 명을 새롭게 했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서경>의 하왕윤정편(夏王胤征篇)에도 하왕의 명으로 윤후가 적을 정벌하러 갈 때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의하여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예전에 물든 더러운 습속을 모두 새로워지도록 해 주겠소”(舊染汚俗 咸與維新)라고 한 고사에 함여유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어 조대비가 고종으로 대통을 잇게 하면서 내린 교서에도 함여유신을 강조하여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함여유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박정희의 주변을 맴돌았던 권력형 역사학자 이선근이 원래 대원군 시대를 전공했기에 일부에서는 유신이란 이름을 이선근이 붙인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유신의 전 과정에 깊숙이 간여했던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은 중국 역사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박종홍과 그의 제자였던 임방현 두 특별보좌관이 <시경>과 <서경>의 고사를 빌려 10·17 조치를 10월유신이라 부를 것을 건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명치유신’ 못 떠올리도록 <시경> 등 끌어대
박종홍이나 이선근이 <시경>, <서경>이나 대원군을 끌어댄 것은 대중들이 유신 하면 당장 명치유신을 떠올리게 되는 것을 호도하려 한 것으로, 요즘의 유행어로 표현하면 유신이라는 말에 담긴 치명적인 일본색을 적당히 ‘마사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10월 이전, 박정희에게 유신이란 명치유신이며, 유신에 다른 근거를 갖다 붙인 이데올로그들도 이 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왜 하필 이름을 지어도 명치유신을 베껴 10월유신이라 지었나 한심하게 여겼지만, 권력의 생리를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유신의 이데올로그들은 박정희가 10·17 특별선언과 10월24일 유엔의 날 기념식 치사에서 연이어 ‘유신적 개혁’이란 말을 쓰는 것을 보고 박정희의 속마음에 들게끔 아예 ‘적’자를 떼어준 것이다. 이에 비하면 국무총리 김종필은 차라리 솔직했다. 그는 정부가 굳이 비상조치를 유신이라고 이름붙인 까닭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일본의 명치유신과 정신적으로 통하는 점이 있다”고 답했다.
박정희는 명치유신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감추지 않았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1963)에서 작은 섬나라 일본이 “명치유신이란 혁명과정을 겪고 난 지 10년 내외에는, 일약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실로 아시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며 “금후 우리의 혁명 수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박정희에게 명치유신은 한국이 계속 따라가야 할 모델이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961년 11월12일 박정희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 등 일본의 만주 인맥과 아카사카의 요정에서 만나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며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라고 밝혀 동석한 일본 정객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박정희의 롤모델이었던 명치유신의 지사들이 누구였을까. 사카모토 료마, 다카스기 신사쿠,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이 일찍 암살당하여 신화화된 인물도 있지만, 정한론을 펼친 사이고 다카모리,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바로 박정희가 감탄해 마지않은 명치유신의 지사들이었다.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그 실력자가 박정희 소장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본 정가는 매우 긴장했다고 한다. 극도로 반일적인 자세를 취했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장면 정권이 들어섰는데 갑자기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는 거의 대부분 민족주의와 친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박정희 사진이 박힌 호외를 본 일본 정객들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아냐?”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들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다카기 마사오라는 조선 청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본명이 박정희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박정희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교장인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 중장에게 큰절을 올린 행위가 일본의 보수인맥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이토 히로부미메이지유신 전설적 지사들은
그가 감탄했던 롤모델이었다 62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의
일 경축특사 오노 반보쿠 왈
“아들의 경사를 보러 왔다” 소화유신 쿠데타 장교들을 선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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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부총재와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일본 정계의 거물로 1962년 말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와 두 차례 회담을 했던 오노 반보쿠. ‘박정희의 아버지’를 자인했다. 일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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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12월 유신쿠데타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회의 투표를 거쳐 사실상 ‘총통’으로 취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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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깊이 간여했던 헌법학자 한태연(왼쪽)과 갈봉근. 두 사람의 성에다 ‘이’ 하나를 더 붙여 ‘한갈이 헌법’이라 부르던 말이 ‘헝가리’ 헌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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